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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법조회고록

[나의법조회고록] 김태청 전 변협회장 ④ 5·18 전야의 시국선언

김태청 전 변협회장 -제3140호-

1975년 서울지방변호사회 임원개선 정기총회를 수주 앞두고 고재호(高在鎬) 선배(작고, 전 대법관·변협회장)로부터 그해 회장선거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나는 펄쩍 뛰며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군 출신인 제가 학과 덕이 부족해 군 후배들의 지지나마 받을까 두려운데 법원이나 검찰 근무경험이 전무한 저로서는 누굴 믿고 감히…?"라고 고사했다.
고 선배는 "그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니 아무말 말고 나 하라는 대로만 하시오"라고 말했다.
눈 딱 감고 이돈명(李敦明) 변호사를 러닝메이트로 해 입후보했는데 뜻밖에 압도적 다수 득표로 당선됐다. 아마도 고 선배를 비롯해 법원, 검찰, 군 출신 여러 회원들 사이에 오고간 이심전심의 성원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4년후인 1979년 4월경 법률신문에 김두현(金斗鉉) 변호사 등 수명이 다음 변협회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났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있던 그 무렵, 나는 우연히 시청앞 지하도에서 소종팔(蘇宗八)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신문기사 얘기와 함께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 뵈려던 참이라면서 윤희경(尹熙慶) 변호사 등 김두현 변호사와 군대 동기생들인 자기들이 이번에는 나를 먼저 모시자고 권유하겠노라고 했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렇게 할 것까지야…"하며 만류했지만 그런 권유를 받은 김두현 변호사는 "선거일이 가까웠는데 아무 말씀도 없어서 나섰던 것인데, 金 선배의 의사가 확인된 이상…"하며 아무 미련없이 즉각 후보를 사퇴했다.
'선거'라는 이름의 행사치고 법조계의 위계의식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미덕이었다.
소중영(蘇重永), 김기옥(金基玉) 두 변호사를 부회장으로 하고 입후보했는데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당선됐다. 법원, 검찰 경력이 없었던 나로서는 실로 뜻밖의 고마운 성원이 아닐 수 없었다.
1980년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국보위라는 초헌법적 통치기구를 만들어 스스로 위원장이 되는 등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에 대해 변협은 5월1일 법의 날을 맞아 '법정요건을 갖추지 못한 계엄은 위법이므로 즉각 해제해야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를 법조 출입기자들에게 돌렸더니 정오 라디오뉴스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을 듣고 놀란 백상기(白翔起) 법무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 성명을 내시려거든 사전에 한마디 귀뜸이라도…"
"했더라면 장관께서 허락이나 했겠습니까?"
변협의 법의 날 성명은 정부의 묵살로 끝났다.
5월 들어 학생들의 시위와 구호는 격화일로를 치달아 15일에는 절정에 달했다.
변협은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해 계엄당국의 탄압을 각오하고 16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시국선언문의 요강은 이랬다. "법적요건을 갖추지 못한 비상계엄을 즉각 해제하라" "유신세력은 인책사퇴하라" "정치시녀로 전락한 조야 법조인의 맹성을 촉구하며 현명하게 처신할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마이동풍인 정부는 이를 묵살하고 도리어 몇시간 후인 17일 자정을 기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선포했다. 격렬한 시위가 지방으로 확산된 가운데 계엄당국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광주의 시민항쟁을 '폭동'으로, 데모대는'폭도'로 규정했다. 다음날인 18일부터 공수부대 얼룩무늬 군인의 학살진압이 시작됐다. 광주시민들에 의한 '미완의 혁명'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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