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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라운지] '순진한 原則論者' 박시환 前 대법관

"법관은 시대의 아픔과 고민에 다가가는 자세 필요"

미국변호사
대법관 박시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린다.
'진보의 아이콘(icon)'으로 평가받기도 하고 보수적인 '법조계의 이단아(異端兒)'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대법관으로 재임했던 시절, 대법원은 사법부의 사명인 '소수자 보호'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에게 판사란 '시대의 고민과 아픔에 애정을 가지고 약자의 입장에서 부당한 힘의 행사를 막아내는 용기를 가진 자'다. '멋진 판결을 할 자신은 없지만 나쁜 재판은 안 하겠다'는 다짐을 실천하다 '유배'를 당하기도 했던 그 '순진한 원칙론자'는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지난달 대법관 임기 6년을 마치고 퇴임한 박 전 대법관을 만나 그의 철학과 법원의 지향점, 장래 계획을 들었다.

서울 방배동의 한 김밥집. 언제부터인가 주말 아침이면 어김없이 콤비를 입은 50대 중후반의 신사가 김밥 두 줄을 사러왔다. 남들 눈엔 집에서 삼시 세끼를 챙겨먹는 '삼식(三食)이' 소리가 듣기 싫어 산에 가는 조기 퇴직자나 가족을 해외로 유학보낸 '기러기 아빠'로 보였다. 토·일요일에 거푸 같은 김밥집에 오던 신사는 김밥집 종업원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그런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일요일에 가는 김밥집은 근처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신사가 토·일요일에 간 곳은 산이 아니라 그의 사무실이었다. 그는 6년을 한결같이 서초동 사무실에서 주말을 잊은 채 점심과 저녁 식사를 김밥으로 때우면서 일에 전념했다. 최근 그 수상한 신사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는 박시환(58·사법연수원 12기) 대법관이었고, 주말 김밥을 싸들고 출근한 곳은 다름아닌 그의 집무실이었다.


지난달 퇴임한 박 대법관을 23일 만났다. 인터뷰는 서초동 법률신문사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아직 진로가 확정되지 않아 개인 사무실이 없기 때문이었다.

퇴임 소감을 묻자 그는 "홀가분하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의 설명을 듣기 전엔 이 말에 얼마나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지 알지 못했다.

"대법관으로 근무하는 6년 내내 일종의 부채감이랄까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저에 대한 (진보적인 판결을 기대하는 이들의) 기대를 너무 의식해도 부적절하고,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화와 진보의 의미가 다소 섞여 들어간 의미로 대법원에서 일정한 역할을 기대하는 분도 계셨는데, '어느 선에서 어느 정도로 그 의미를 실어 재판하는 것이 적절할까'하는 것이 늘 걱정이고 부담이었습니다." 그는 "대법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 하는 걱정이나 두려움, 죄송스러움이 있다"고 말했다.

박 대법관은 2005년 대법관에 임명제청됐을 당시 '사법개혁을 요구하고 진보적 판결을 많이 낸 개혁성향의 법조인'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는 "대법관이 되기 전부터 사법개혁을 주장하고 진보적 판결을 많이 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러한 면을 강조할 만큼 진보 판결을 많이 냈다든가 사법개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많은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또 "진보적 판결이라는 것도 그와 다르게 판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판결한 것이지, 우리 사회를 진보로 바꾼다든지 진보 진영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취지로 한 건 더더욱 아니다"라며 "법관은 다양하게 구성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 대법관은 대법관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스스럼없이 '문제의식'이라고 답했다. 그는 "대법원의 정책법원 기능을 중시한다면, (사회적) 의미가 숨겨진 사건을 찾아내서 시의적절하게 법리화시켜서 내놓는 문제의식과 순발력이 필요하다"며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될 수 있는 쟁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어떤 유형의 사건으로 다가올 것인지 상상하거나 연상하고 있다가 실제 사건이 대법원에 오면 재빨리 잡아내서 문제화하는 자질이야말로 대법관이 갖춰야할 덕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구체적으로는 그런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사건이 왔을 때 이번 기회에 그 사건을 통해 그런 것이 한 번 발현되도록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번 사건으로는 그 의미를 살리기는 다소 모자라거나 부적절한 사건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며 "오래 생각할 시간 없이 시의적절하게 순발력 있게 해야 하는 점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박 대법관은 김영란 이홍훈 김지형 전 대법관, 전수안 대법관 등과 함께 독수리 5형제라 불릴 정도로 소수의견을 많이 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내가 법을 공부하고 법관생활을 하면서 지녔던 기본 철학은 민주주의 사회는 사람이 각각 다르고 모두 자기 방식으로 살 자유가 있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그리고 다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하고 핍박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해를 끼칠 때에만 다름을 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적표현물의 이적 목적 추정 판례를 뒤집은 '실천연대 사건'(대법원 2010도1189 판결)을 예로 들었다. "국가보안법의 핵심은 위험성의 기준이며 다른 (정치)체제와 가까이 한다고 해서 곧바로 처벌 요건이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의 자유는 다른 생각을 할 자유이며 지금 체제와 맞지 않아도 즉각적이고도 심각한 위험성을 동반하지 않으면 참아줘야 합니다." 그는 "위험성의 기준에는 여러 단계가 있는데 현재 대법원 판례는 너무 낮은 단계의 처벌을 용인하고 있다"며 "미국처럼 명백현존하는 위험 원칙은 아니더라도 우리도 좀 더 엄격한 원칙을 적용해야 된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외국 군대 철수를 말하는 것도 완전히 봉쇄하기보다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하는지, 어떤 방법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는 것인지 따져보고, 위험성이 확실하면 처벌하고 그렇지 않으면 토론을 통해서 수용해야 한다"며 "반미를 주장하는 사람 중에서 수사기관이나 검찰이 선별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법 해석의 여지를 남겨둬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원이 지금보다 더 다양하게 구성돼야 한다고 했다. "다수자들로만 법관을 구성하면 (소수자들을) 심정적으로 깊이 이해해서 재판을 하기에는 부족하므로 소수자들과 같은 진동수를 가진 사람이 법관으로 들어가 있어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법관 입장에서 말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야 소수자 입장에서는 결론이 다르게 나오더라도 '우리 얘기는 듣지도 않았구나'하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된다"며 "법관의 다양성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성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를 위해서는 대법관 후보군이 지금보다 확대돼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과 같은 기준과 방식으로 대법관을 제청해서는 대법원의 다양화에 역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는 현실적으로 업무처리 능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은 맞지만 적은 수의 사건만을 처리할 여건을 만든 후에야 업무처리 능력과 상관없이 다양성을 고려해 뽑겠다고 하면 과연 그 때가 오겠나"며 "대법원 사건 수를 줄이든지 보조 인력을 강화하든지 해서 정책 법원으로 소수사건만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 국민들이 대법원이 다양해야 하고 정책법원으로 소수의 중요한 사건만으로 법적 가치결정만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 대법원이 정책법원으로서의 역할을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도록 해본 경우가 너무 적다"며 아쉬워했다.



후배 법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묻자, "결국 법관은 재판을 잘해야 하고 이 사회의 고민을 잘 해결해 줘야 하는데, 고민을 잘 해결하려면 그 고민에 대해 애정을 갖고 같이 가슴 아파해 봐야 한다"며 "법관들이 갖춰야할 덕목은 객관적 관조도 필요하지만 시대의 고민과 아픔에 애정을 갖고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강자는 항상 자기의 이익을 보호해 줄 기구와 인력과 자원을 갖고 있다"며 "균형을 잡으려면 약자의 입장에 힘을 보태서 강자의 부당한 힘의 행사를 막아내는 용기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대법관은 법조인 집안에서 태어나 판사라는 직업이 그리 동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의 부친은 부장판사로 근무하다 변호사를 개업한 고 박영도 변호사다. 박 변호사는 교사로 근무하다 제9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부산지법 부장판사로 근무하다 판사 월급으로 박 대법관을 포함해 6남매를 키우기가 어려워 74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래서 박 변호사는 늘 박 대법관이 못다한 판사의 꿈을 채워주길 바랬지만, 아들 박시환은 판사가 되자마자 사고(?)를 치고 만다. 1985년 인천지법 판사로 부임하자마자 반정부 시위로 재판에 넘겨진 학생 11명에게 무죄를 선고해 발령 6개월 만에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좌천된 것이다. 당시 서태영 서울지법 판사가 이와 관련해 법률신문에 '인사유감'이라는 글을 기고했다가 울산지원으로 좌천됐으며, 사법사상 초유의 대법원장 탄핵사건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아들이 엘리트 판사의 길을 걷기를 바랬던 부친은 난감해 했지만, 서슬이 퍼랬던 5공화국 시절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낸 아들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박 대법관은 "과거 유신과 5공화국 등 권위주의 시절에 저렇게 재판해서는 안될 것 같은 재판이 눈에 많이 띄었고 그런 사법부의 판사가 된다는 것이 창피했고 마음이 무거웠다"며 "사법연수원 시절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고 멋진 판결을 할 자신은 없지만 나쁜 재판은 안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나쁜 재판을 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국민들이 심정이 풀리지 않겠나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내년에 정권이 교체된다면 박 대법관이 헌법재판소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도 흘러 나온다. 하지만 공직에 진출할 뜻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누가 나보고 순진한 원칙론자라고 하더라"라며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기관을 운영할 수 있는 자질이 없는데다 기질 자체가 그런 것과는 맞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내년 봄학기부터 서울의 한 대학에서 '전임교수'로 강단에 설 계획이다. 대법관 출신들이 대체로 '석좌교수'로 강단에 서는 관례에 비춰보면 박 대법관의 행보는 파격에 가깝다.

글=이환춘 기자, 사진=홍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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