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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라운지] 세계상사중재위 사무총장 '태평양' 김갑유 변호사

'국제중재' 불모지 한국에 '국제중재의 날' 유치 거뜬히…

40대의 나이에 항공 마일리지가 200만 마일이 넘는 김갑유 변호사는 대한민국과 한국사람이 살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할수록 아시아 지역만큼은 한국의 주도가 적합하다고 느끼고 있다. 특히 법률문제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샌드위치 국가가 가장 적합하다고 강조한다. "세상일은 좀처럼 내 생각처럼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다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잘 되더군요" 그는 노력하다보니 전혀 생각지도 않던 국제중재기구 사무총장이 됐다는 것. 요즘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줄 말이다.

김갑유, 그는 올해 최고의 해를 맞이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도 전 세계 국제중재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3월4일 서울 장충동 호텔신라에서 전세계 350여명의 국제중재 전문가들이 모인 가운데 국제변호사협회(IBA)의 제14차 '국제중재의 날(Arbitration Day)' 행사가 치뤄졌다. 법무법인 태평양 국제중재팀장 김갑유(48·사법연수원 17기) 변호사는 이 행사의 서울 유치를 위해 지난 2년여간 대한변협 조직위원회 위원장과 IBA 조직위원회위원 및 유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전 세계를 누비며 위원들을 설득했다. 그의 활약으로 대회가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열렸다. 이 행사는 아시아에서는 두번째, 동북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리는 것으로 그동안 국제중재시장에서 변방으로 치부되던 한국이 세계중재시장에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더구나 1998년 외환위기때에만 해도 국제중재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이 땅에 불과 12년여만에 국제중재의 날 행사가 열렸으니 가히 상전벽해라고 할만하다.



이번 국제중재의날 행사 전야에서 열린 GAR(Global Arbitration Review) 2011년 시상식에서 국내로펌 중에서는 유일하게 태평양이 세계 30대 국제중재 로펌(GAR 30) 중 하나로 선정되어 세계적인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아시아지역 로펌 중에 30대 로펌에 뽑힌 로펌은 태평양 이외에 싱가폴 로펌 한 곳뿐이다. 다른 로펌들은 변호사가 수천명에 달하는 영미계 로펌들이다. 이날 태평양은 또 2010년 세계 최대의 국제중재사건을 수행한 대리인에게 수여하는 '올해의 국제중재상'도 받았다. 우리나라 로펌이 대리한 사건이 세계에서 1등상을 받은 것이다.

김 변호사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국제중재기구인 런던중재법원(LCIA) 상임이사, 국제상업회의소 중재법원(ICC), 미국중재인협회(AAA)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아시아인 최초로 UN 산하 세계상사중재위원회(ICCA) 사무총장으로 선출돼 활동하는 등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체 중재시장을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중심축이 되고 있다.

그는 고조부때부터 5대를 내리 살아온 대구 토박이다. 유명한 약령시가 서는 대구의 중심지인 중구 종로2가 44번지가 본적지로 대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를 다녔다. 어린 시절에는 그림이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에는 그림을 그려서 중앙일보에서 개최한 전국대회에서 1등을 해서 당시로서는 꽤 비싼 자전거를 부상으로 받은 적도 있다. 중고교 시절에는 독후감을 써서 몇 번씩 전국대회에서 1등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78년 능인고교 1학년때 현대그룹 故 정주영 회장이 설립한 아산재단에서 선발하는 아산장학생으로 뽑혀서 장학금을 받았다. 그 때 정 회장이 1977년 재단을 설립한 이후 처음 장학생을 선발했던 참이라 대구에 직접 와서 장학생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했다. 김 변호사는 맨 앞줄에 앉아서 요즘 TV광고에 나오는 정 회장이 현대중공업을 세운 에피소드를 직접 들었다. 항공사진 한 장 들고 영국은행에서 돈 빌리는 과정, 조선소도 없는데 건조계약을 따내는 것 등등…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GAR '올해의 국제중재상'을 받은 '현대오일뱅크 중재사건'의 의뢰인이 바로 정 회장이 그 당시 설명했던 현대중공업이라는 사실이다. "이 중재사건으로 현대중공업은 수조원의 이익을 보았는데 고 정주영 회장님께서도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김 변호사는 어릴 때부터 꼭 판사가 되는 것이 숙명인 줄 알고 서울법대를 진학하고 1984년 재학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의 학창시절이 굴곡 없이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고1때 건강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그는 틈틈이 중학생 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어린 나이에 충격이었지만 어머니를 생각해 마음을 모질게 잡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는 사법연수원 입소를 미루고 대학원에 진학, 로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변호사의 길을 가게 됐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의외의 결정이어서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1988년 변호사가 됐다. 처음에는 일반상사거래 자문업무와 기업인수합병(M&A) 관련 업무를 주로 하다가 보험해상업무로 전문분야를 바꿔서 상당기간 동안 보험해상 업무를 했다. 5년후 93년 하버드 로스쿨로 유학,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뉴욕, 런던의 로펌에서 1년간 일했다. 95년 한국에 돌아와 태평양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가 전공으로 삼던 보험해상 분야의 일거리가 크게 줄어 일이 많지 않았다.

마침 IMF 외환위기가 닥쳐 다시 M&A 일을 하는 와중에 국제중재 일도 함께 맡게 됐다. 그는 소송과 국제거래 경험도 있는데다, 당시 영어까지 잘하는 변호사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국제중재를 하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첫 번째 국제중재 사건에서 세계적인 로펌의 변호사를 상대로 승리를 일궈냈다.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때 그는 "한국기업은 한국변호사가 훨씬 더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가 국제중재를 본격적으로 하겠다고 밝히자 또다시 주변에서는 말리고 나섰다. 국제중재는 초대형 영미계 로펌들이나 하는 일이지, 국내로펌에서는 할 능력도, 기회조차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판사 대신 변호사를 선택할 때처럼 태평양의 경영진과 파트너들을 설득해 2002년 국내최초로 국제중재팀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누가 보아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한국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규모 국제중재는 당연히 초대형 외국로펌들만 수행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0년전 당시 국제중재 시장이 이렇게 커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사실 저 도 우연히 국제중재 일을 하게 된 것이지요. 외국변호사와 함께 중재법정 변론(Hearing)에서 겨루고 난 뒤에야 '아! 한국변호사도 경쟁력이 있구나, 국제중재분야는 한국변호사가 꼭 진출해야 하는 분야구나'라고 확신했죠. 처음부터 국제중재가 독립된 전문분야가 된다거나 국제중재팀을 만들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태평양은 김 변호사가 당장 수익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대외활동과 국제회의 참석 등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세계 유수의 국제중재기관과 중재인모임에 참여해 중요 직책과 업무에 적극적으로 자원했다. 김 변호사가 처음 국제사회에 나가 보니 한국법조인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한국법률가의 우수성을 세계시장에 알려야 비로소 우리에게 기회가 온다고 생각했다.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제회의에 적극 참석하는 것은 물론, 가능한 발표자로 자주 나서려고 애섰다. 어차피 처리하는 사건이 전 세계 도시에 퍼져 있어서 출장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기회를 잘 활용했던 것이다.

그는 1년에 평균 15번 정도 해외출장을 다녔고 지난해에는 스무번이 넘었다. 행선지는 주로 파리-런던-싱가폴-홍콩-제네바-헤이그-뉴욕 등 순으로 국제중재기구가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비행기 탑승 마일리지가 200만 마일을 훌쩍 넘겼다. 대개 밀리언 마일러는 여행을 자주 간다는 사람도 60대 후반이나 70대가 돼야 겨우 가입한다. 그런데 40대 초중반에 밀리언 마일러 클럽에 가입했으니 참 어지간히 다녔다. 1년에 100일 정도는 해외에 머무르면서 사건도 처리하고 국제회의 및 세미나 등 국제법률가 사회를 위한 여러 가지 업무도 함께 수행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한국의 김 변호사가 점차 국제중재 사회에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한번 알려지게 되자 급속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굳이 감투를 쓸려고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주변에서 주요보직을 추천해 저절로 됐습니다." 김 변호사가 세계 3대 국제중재기구 상임위원과 ICCA 사무총장 등에 선출된 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는 참 스케일이 크고 가슴 속에는 짙은 애국심이 깔려있다. 그는 스스로 체득한 국제중재 경험과 노하우를 혼자만 사용하지 않고 국내 로펌의 변호사 및 전문가들과 공유했다. 국제중재분야에서 활동하는 장승화 서울대·김기창 고려대 로스쿨교수, 김범수 세종·이영석 율촌 국제중재팀장이 모두 대학 또는 사법시험 동기들이다. 김앤장 국제중재팀장 윤병철 변호사는 고교·대학 동기동창이다. 그는 친구들을 국제중재로 끌어 들였고, 장승화 교수와 함께 국제중재실무회를 창설해 한국의 국제중재시장 발전을 도모했다. "나 혼자 잘해선 번창할 수 없고 함께해야 커집니다. 마치 신발가게가 홀로 있으면 장사가 잘 안되고 오히려 여러 개의 신발가게가 몰려 있으면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장사가 잘되는 이치이지요."

"국제중재시장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변호사가 한국보다 크게 뒤쳐진 것은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 정보를 독식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는 제가 체득한 모든 것을 국내 로펌은 물론, 학계와 전문가들에게 오픈하고 공유했기 때문에 한국의 국제중재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저변확대가 이뤄진 것입니다."

"이제는 한국의 국제중재 시장규모와 실력은 중국과 일본이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전 세계 법률시장은 영국과 미국의 유태계가 지배하고 있고 아시아 법률시장은 한국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주요 법률전문가들이 영미법과 대륙법 모두를 공부한 국가는 한국뿐입니다. 앞으로 법률분야의 글로벌 스탠다드는 한국이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김 변호사는 새로운 분야로 국제인권에 관심이 많다. "한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인권문제를 주도해야 할 국가입니다. 저는 인권분야에 관해서는 지식이 일천하지만 지금부터라도 공부해서 국제 인권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늘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보이는 김 변호사의 도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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