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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만나는 법] 법조계 ‘봉사의 왕’ 오윤덕 변호사

법의 정신은 실존주의… 휴머니즘과 맞닿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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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얘긴 처음 털어놓는 거라고 했다. 1950년 만 여덟 살의 소년은 서울 종암동 관사에서 서울상대 교수인 아버지와 평양 숭의여전 출신 어머니 슬하에서 평탄하게 삶의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집에는 오르간이 있었다고.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터지고 국립대 교수인 아버지는 급히 몸을 피하면서 가족에게 먼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고 이른다. 이렇게 가장이 없는 4인 가족은 한강을 건너기는 하였으나 전선은 이미 그의 가족을 앞질러 남으로 내려가 버린다. 피난길을 돌려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게 된다. 뜨거운 뙤약볕이 지글지글 타오르던 그해 7월 초 강변에서 소년은 구토를 유발하는 악취와 함께 참혹하게 썩어가는 주검을 목도한다. 그 순간 비명과도 같은 정적과 함께 조숙한 소년의 삶은 멈춰버렸을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리고 그 작은 육신 안에 감당할 수 없는 크기와 중량을 가진 영적 통찰이 들어왔을 거라고도 추정한다. 인터뷰를 마친 시점에서 미리 언급하면 이후 오윤덕 변호사(80·사법연수원 3기)의 삶은 그 유년의 음화(陰畫)를 다시 읽어내는 치열한 수행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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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력 ]

오윤덕(80·사법연수원 3기) 변호사는 1965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73년 대구지법에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대전지법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법 부장판사 등을 지낸 뒤 1994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후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위원, 법무법인 송백 대표변호사, 서울법대장학재단 이사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시민감시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오 변호사는 2003년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제도권밖 청년들을 위한 열린 쉼터 '사랑샘'을 설립운영했다. 쉼터는 현재 ‘재단법인 사랑샘’으로 이어져 법률복지 전반에 걸친 사회공헌활동으로 사회적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


“영화로 봐도 참 끔찍하게 느껴질 일인데, 그걸 두 눈으로 본 거예요. 지옥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었어요. 어머니는 더는 보지 말라면서 내 눈을 손으로 가려주셨죠. 그 어머니의 손바닥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어린 아들의 영혼이 상처받을까 비참한 현실을 손으로 가려준 어머니는 당시 임신중이었는데, 아이를 낳자마자 삶을 마친다. 그때 나온 아이도 영아 때 하늘나라로 갔다고. 이게 과연 소년 시절에 겪을 만한 일인가. (나 같은 전후 세대는 여기서부터 오 변호사 세대에게 실존적 열등감을 느낀다.) 1950년대는 ‘실존주의’가 세계지성계를 휩쓸던 시기였다. 2차세계대전의 참화를 경험한 지식인과 작가들이 본능적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와 가치를 찾으려 했던 것. 그 지적 경향에 인본을 중심에 둔 휴머니즘이 보강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민했던 소년 역시 그때 막연하게나마 실존적 질문과 휴머니즘의 정서를 내면에 깊이 장착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정신적 내상을 입은 아버지는 고향인 제주도로 낙향해 교육에 헌신하는 쪽을 택했단다. (이후 아버지는 국립 제주대학교 개교 작업의 산파가 되고 이후 그곳에서 정년을 마친다) 소년 오윤덕도 제주도의 초등학교로 전학해 수업을 계속하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친다. 당시 제주도엔 부모를 잃어버린 전쟁고아들이 많았다. 1000명 이상 내도하였는데 다니던 중학교는 한 반에 5~6명 이상이었고 문제도 곧잘 일으키곤 했다. 그런데 명문가의 자제랄 수 있는 오윤덕은 무람없이 이들에게 끌렸단다.

“선생님들은 다 이상하게 생각했죠. 아버지가 인텔리인 아이가 고아원 아이들과 어울리니까요. 당시 고아들은 학교 안에서도 밖에서도보살핌을 못 받았는데, 저는 그걸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한 친구가 사고를 쳐서 구속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아버지에게 이 친구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검찰에 이 친구의 신원보증인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 친구가 석방이 되고 아버지께 고맙다고 인사를 오자 아버지는 내게 감사할 일이 아니라 검사님께 감사하고 그분 앞에서 평생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도리라면서 친구와 저를 데리고 검찰청엘 갔어요. 그런데 검사님을 보는 순간 지은 죄도 없는 제가 덜덜 떨리는 거예요. 검사님은 바르게 살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질정을 하셨는데, 검찰청을 나오면서 아버지에게 즉흥적으로 말했어요. 저 꼭 검사가 되겠다고요. 고아들이 무슨 죄가 있냐고, 다 전쟁 때문 아니냐고요.”

여덟 살에 6·25…피난길 끔찍한 죽음 목도
못 보게 눈 가려준 어머니 손바닥 못 잊어
전쟁 말기 제주도로…고아들과 애틋한 정
판사 퇴직 후 고시촌에 ‘청년 사랑샘’ 설립
2015년 11월 재단법인으로…사회공헌 실천
혼자의 삶은 의미없어 공생이 곧 나를 살려


물경 70년 동안 맺힌 응어리였을까. 이 일화를 들려주는 오 변호사의 눈이 일순 붉어지더니 곧 눈물이 핑 돌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고아 친구들을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했는데, 아마 그 말은 외면하려 했지만 그게 잘 안됐다는 말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저마다 연민이나 동정의 총량이라는 게 있을 텐데 오윤덕은 애초 태어나길 너무나 큰 연민을 안고 태어난 것. 존귀한 영혼은 신에게 점지된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가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한 이유 역시 그 연민을 질서 있고 조화롭게 분배할 수 있는 길이 법에 있다고 보았던 때문은 아닐는지. 그래서 그날 벼락처럼 다가온 삶의 소여를 깨닫고 그것에 귀의를 했던 건 아닐까.

“대학에 들어갈 즈음 우리 세대는 4.19와 5.16을 경험했고 당시 문맹률은 60퍼센트에 달했어요. 저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지만 물리칠 수 없는 삶의 신비에 대한 응시와 관찰을 게을리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최재희, 안병욱, 김형석 등 쟁쟁한 교수들의 철학 수업을 들었죠. 그때 함께 지적 세례를 받은, 나중에 다양한 분야에서 입지전적 삶을 살아낸 친구들도 만났구요. 특히 칸트 철학의 권위자였던 최재희 교수의 경우엔 댁에까지 찾아가는 등 각별한 사제 관계를 맺었어요. 그때의 영향으로 교우들과 함께 <한국휴머니스트학생회>라는 문화계몽운동 모임을 만들어 지적·문화적 훈련을 하기도 했죠. 철학 소고 <새로운 인간상의 창조>를 써서 상을 받기도 한 것도 그 즈음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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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덕 변호사는 익히 알려진 바 법조계에서는 ‘봉사의 왕’으로 불리며 존경을 한몸에 받는 원로다. 판사직을 마친 후 자신의 젊은 날처럼 시험에 떨어져 제도권 밖에서 힘겹게 학업을 이어가는 청년들을 위해 지난 2003년 평생 모은 재산 5억 원을 들여 신림동 고시촌에 100평 건물 세를 내고 사비로 운영하는 ‘이 땅의 청년들을 위한 열린 쉼터 사랑샘’을 열었던 것. 이후 청년 세대를 위한 그의 봉사와 헌신은 계속됐고 많은 청년들의 삶을 흔들어 깨우고 일으키는 사역을 이어왔다.

그러던 중 2011년 2월 사랑샘이 입주해 있던 건물이 재건축으로 철거되는 바람에 고시촌을 떠나게 된다. 이후 오 변호사가 마련했던 사랑샘의 기본 자산은 2012년 2월 대한변호사협회 산하 재단법인으로 재탄생되고, 2015년 11월에는 법인명을 ‘재단법인 사랑샘’으로 바꿔 대한변협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고, 사랑샘의 사회공헌 실천정신은 이에 뜻을 같이하는 변호사와 공익변호사 그리고 후원자들의 동참에 힘입어 그 활동영역을 법률복지 전반으로 확장시키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단다.

“사랑샘이 신림동 고시촌을 떠난 2011년 무렵까지도 ‘사시 낭인’의 방지가 주요 제정 목적 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었고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변호사 시험도 ‘자격시험’으로 보고 5년 동안 5회만 허용하고 이후 응시를 금지하는 ‘오탈제’를 채택한 거예요. 이 제도에 따라 더 이상 변호사시험을 칠 수 없게 된 사람을 ‘오탈자’라고 부르고 있죠. (오 변호사는 이 용어가 적절한지에 관하여는 의문이 있으나 세간에서 통용되고 있어 부득이 이 용어를 차용함을 양해바란다고 밝혔다.) 내 관심은 자연스럽게 이들에게 옮겨갔어요.”

그리하여 오윤덕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단다. 오탈자로 상처받은 청년들에게 1인당 200만원의 마중물 지원금을 지급했던 것. 지원 대상자는 지원금으로 어떤 활동을 할지 계획서를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활동 내용은 견문을 넓히는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진로를 위한 공부에 투자하는 등 전적으로 지원자가 자유롭게 정하면 된다고. 다만 지원금을 통한 활동과 결과를 정리하는 에세이를 형식이나 분량에 상관없이 써야 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실과 열정을 다 바쳐온 청년들이 변호사 시험에서 ‘오탈’이라는 혹독한 제도적 멍에를 짊어지고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제도적 출구가 보이지 않는 참담한 현실에 절망하며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사전에 건넸던 질문 내역이 무색하게 80년 생애가 응축한 서사를 자신만의 문법으로 풀어놓으며 그 속에 세인들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짚었는데 그것이 내게는 마치 필경사의 연금술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지성과 감각, 문학적 직관, 인문적 감수성 등을 자기 몸 안에서 일체화한 사람만이 일으킬 수 있는 감응력을 느꼈다고 할까. 그에게 법률가가 안 되었다면 틀림없이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종교철학자가 되었을 것 같다고 하니 그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다시 삶으로 돌아갔다. 원시반본(原始返本)의 궁극을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 대해.

“이만큼 살아보니 인간의 삶이라는 게 죽음을 걸고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거기에 선한 인간성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요. 제가 평생 숙고했던 휴머니즘이나 실존주의는 법이 지향하는 가치와 만날 수밖에 없어요. 헌법학을 보면 Human Rights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요. 그게 다 휴머니즘과 실존주의 가치와 연결되는 거잖아요. 그런 정신에서 적십자를 창설한 앙리 뒤낭이 나오고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혼자 사는 삶은 의미가 없고 타인과의 공생이 곧 나를 살리는 것인데, 타인의 상처를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이 울어주는 것뿐이라는 것도 80년을 사는 동안 깨달은 치유의 은총이에요.”

어른이 사라진 시대라고들 한다. 청년 세대들은 사표로 삼을 만한 어른이 없다고 자조한다. 그런데 여기 살아 있는, 허공에 대고 피맺힌 기침을 하는, 풀처럼 일어나는 어른 한 사람이 있다.


김도언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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