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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회고록][전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4)

3부 채색(彩色) ⑭ 소용돌이 속에 거쳐 간 요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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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뿔과 송곳니를 함께 지닌 맹수의 화석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1992. 7. 29. ~ 1993. 3. 16.)

 

1993년에 문민정부가 출범하기 전해인 1992년 7월 29일자 검찰 고위직 인사 발령에 따라 나는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직에서 제9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전보되었다. 그때는 제6공화국 노태우 대통령 정부의 말기였다.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다음 날인 12월 19일 김영삼 씨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다. 그의 취임식은 1993년 2월 2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때를 전후한 법무 검찰 수뇌부의 동정을 살펴보면, 허형구 법무부 장관에게 특별히 요청하여 나를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에서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으로 전보시켰던 김기춘 검찰총장은 내가 범죄와의 전쟁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인 1990년 12월 4일 임기제 초대 검찰총장으로 2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야인이 되었다.

  

그다음 날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인 정구영(鄭銶永) 씨가 임기제 제2대 검찰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 6개월 뒤인 1991년 5월 17일 김기춘 씨는 법무부 장관으로 다시 관직에 기용되었다. 그의 장관 재임 중인 1992년 7월 28일자 인사 발령으로 내가 중앙수사부장으로 전보된 것이다. 정구영 검찰총장의 임기가 약 4개월 남짓 남아 있었다.

나의 7개월 남짓한 중앙수사부장 재직 중에 내가 상사로 모신 법무부 장관은 4명, 검찰총장은 3명이나 된다. 1992년 10월 9일 김기춘 장관 후임으로 대법관 출신인 이정우(李正雨) 씨가, 1993년 2월 26일 박희태(朴熺太) 씨가, 1993년 3월 8일 현직 검찰총장이었던 김두희(金斗喜) 씨가 각 법무부 장관직에 취임하였다. 정구영 검찰총장이 임기를 마친 다음 그의 뒤를 이었던 김두희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에 기용되면서 그 후임으로 대검 차장검사인 박종철(朴鍾喆) 씨가 검찰총장으로 승진 임용되었으므로 그 숫자의 합계가 7이다.


제6공화국의 노태우 대통령 정부가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로 이어지기까지 숨 막히게 돌아가는 법무 검찰 수뇌부의 개편이 이러했다. 문민정부의 출범 전인 1992년 7월 29일자 검찰 고위직 인사에 따라 나는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승진한 신건(辛建) 씨의 후임으로 중앙수사부장이 된 것이다.

내가 검사로서 거친 공직의 회고록이라고 할 만한 이런 글을 쓰기 전에 미리 준비했던 문서가 하나 있다. 스스로 이름 붙인 이 문서의 제목은 ‘공직기간별 조견표’로서 내 보직의 명칭과 그 기간 중 법무 검찰 지휘부의 신상 변동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표시한 도표이다.

내가 검사로 임관된 이후 거친 정권의 시대적 명칭은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제5공화국, 제6공화국의 노태우 대통령 정부와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다. 그 기간 중 내가 상사로 모셨던 법무부 장관은 22명, 검찰총장은 15명, 대검찰청 차장검사는 17명이다. 검찰총장의 숫자가 법무부 장관보다 적은 이유는 그나마 신직수 검찰총장의 재임 기간 10년 정도였기 때문이다.

내가 검사로서 살아온 기간이 이처럼 질풍노도의 시대를 관통하는 것이어서 위와 같은 조견표 없이 내 기억만을 더듬어 글을 쓸 수는 없었으므로 미리 이 문서를 준비했다. 중앙수사부장 시절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합계인 7명의 이름을 틀림없이 여기에 적은 것은 이런 조견표 덕분이다. 행정부 소속 검찰은 법조라는 같은 이름을 쓰는 옆집인 사법부 소속 법원과는 전혀 딴판인 세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연혁을 살펴본다.


1961년에 대검찰청에 중앙수사국이란 기구가 출범한 이래 1973년에 이르러 이 조직은 대검찰청 특별수사부로 개편되었다. 그로부터 8년이 흐른 다음 1981년 4월에 이 특별수사부는 다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러므로 명칭만으로 보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출생년도는 1982년이다. 내가 법무부 법무과장직을 마치고 서울지방검찰청의 특별수사 제3부장으로 임명된 그해였다.

이 조직이 30년을 넘기면서 검찰의 숱한 비화를 남기며 이어져 내려오다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인 그해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중앙수사부를 폐지하는 정부 조직 개편내용이 대통령 당선인에게 보고되었다.


박 대통령 재임 중인 2013년 4월 23일 중앙수사부의 현판 하강식이 있었으므로 역사적으로만 본다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라는 조직은 1981년 4월부터 2013년 4월까지 만 32년간 존속했던 검찰총장 직할 수사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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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23일 열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현판 강하식’. 중수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제공=연합뉴스>

 

초대 이종남 씨로부터 31대 김경수 씨에 이르기까지 31명의 검사가 이 조직의 수장이었다. 사람마다 재직 기간이 다르기는 하나 평균적으로는 1년 정도 이 직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명단을 훑어보니 일세를 풍미했던 당대의 명검사들이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았음을 알겠다.

 

1992년 7월 29일자 인사 발령으로 나는 1년 3개월 20일간 근무한 제33대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에서 대검찰청의 제9대 중앙수사부장으로 전보되었다. 이 인사 당시의 법무부 장관은 김기춘, 검찰총장은 정구영, 대검 차장검사는 서정신 씨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라는 수사기구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직이다. 내가 한때 그 책임자로 근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런 글을 써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 중앙수사부는 이미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춰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으나 그 발자취는 엄연히 남아 있다. 이 중앙수사부라는 수사기구에 관하여 각종 언론 이외에 검찰 선후배는 물론 법조 전반을 훑어보아도 누가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나는 법무 검찰의 이런저런 직책을 맡아 공직 생활을 해 오다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라는 직책을 거친 사람이므로 내가 경험하고 느낀 몇 가지 소회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또한 나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이미 모습은 보이지 않더라도 흔적은 분명히 남아 있으므로 이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어떤 의미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최초 발족 당시에는 제1과 내지 제4과를 두어 각 과가 독자적으로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할 수 있었다. 즉, 검사인 각 과의 과장이 서울지방검찰청의 부장검사 겸직 발령을 받아 수사하고 공소를 제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의 개정으로 중앙수사부 출범 3년 뒤인 1984년에 과학수사운용과가 새로 설치되었고, 1991년 8월 1일 과학수사지도과가 다시 생겼다. 직접 수사가 아닌 수사 지원 기능이 추가된 것이다.

 

이런 조직이 1998년 3월에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과학수사지도과와 과학수사운용과 등 두 과는 대검찰청 총무부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중앙수사부 제4과가 폐지되면서 수사기획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범죄정보관리과가 새로 신설되었으므로 수적으로는 한 과가 줄었다.

내가 중앙수사부장으로 부임한 때가 1992년이었으므로 당시는 수사 제1-4과, 과학수사운용과, 과학수사지도과 등 6개 과가 중앙수사부 소속이었다. 나의 재임 중에 이 조직의 개편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이루어진 때는 1995년이었으므로 이때는 내가 대검 차장검사로 재직하던 때였다.

중앙수사부장직을 수행하다 보니 이 과학수사운용과와 과학수사지도과가 중앙수사부 소속이므로 인하여 초래되는 문제점을 알 수 있었다.

 

과학수사지도과는 과학수사의 종합 계획, 과학수사 기법의 개발 및 운영, 과학수사 장비의 확보, 운영, 관리, 개선과 과학수사요원의 지도 및 교육이 그 업무이고, 과학수사운영과는 범죄수사와 관련된 감정, 감식과 그 기술의 연구 개발이 그 주된 업무였다.

이 2개 과는 직접 수사가 아닌 수사 보조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인데, 과학수사의 장기계획 이외에 일선 수사기관의 의뢰에 따라 문서의 필적 및 인영 감정과 유전자 등의 감식을 수행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이런 감정이나 감식 업무는 수사기구와는 업무 내용과 기능이 달라서 한 지붕 밑에 있는 것이 때로는 바람직하지 않다. 수사의 주체와는 분리된 기관이나 다른 부서가 이런 일을 수행할 때만 객관성이나 신빙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이 방에서 수사 의뢰한 내용을 저 방에서 그렇다, 아니다 라고 판정한다면 그 증거의 신빙성에 큰 손상을 주는 모순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내가 스스로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므로 대검찰청 차장검사직을 수행하면서 과학수사에 관련된 2개 과를 무색무취한 총부무의 소관으로 이관시켰다. 이는 중앙수사부만의 업무가 아니라 검찰이라는 기관 자체의 소관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사 1-4과가 모두 독자적으로 수사와 공소 제기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이를 총괄 조정하면서 유기적으로 수사할 수 있도록 수사기획관이라는 부서를 새로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런 직제 개편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수사 제1과가 이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의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기획단을 꾸려 법무 검찰 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한 내용은 이미 언급한 한 바 있다. 그 장기계획에는 중앙수사부의 개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이 들어 있었다.

 

직접 수사 기능을 축소하고, 자체 수사와 일선 검찰청 특별수사부에 대한 총괄 조정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이런 직제 개편을 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중앙수사부의 직접 수사 기능이 결국 검찰의 아킬레스건이 되어 이 조직은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법원조직법과 검찰청법에 따르면 형사소송은 3심제이므로 1심 판결은 지방법원에서, 2심 판결은 지방법원 항소부 또는 고등법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최종 판결은 대법원에서 선고되어야 한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소속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더라도 대검에 상응하는 대법원이 1심 판결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대검의 중앙수사부 소속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지방검찰청의 검사 자격이 있어야 하므로 공소 제기하는 검사의 직명에 겸직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 일종의 편법이다.

 

이런 사소한 문제는 간단한 행정조치로 해결될 수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가 중앙수사부에 존재하고 있었다.

중앙수사부에서 수사를 담당하는 각과의 직제를 보면 공통적으로 “검찰총장이 명하는 범죄 사건의 수사”라는 15글자가 명시되어 있다. 수사와 공소를 제기하는 검사의 이름은 검찰총장의 성명과 다르겠지만 이 15글자의 뜻만 풀이하면 검찰총장이 곧 주임 검사라는 뜻이다. 이런 수사가 필요한 경우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으나 과연 검찰총장이 직접 나서서 명령하는 수사가 늘 발생한다고 기대하기는 어렵고, 우리 검찰의 조직 원리에 비추어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생겨서는 안 된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에 따라 독립관청인 전국의 모든 검사가 검찰총장의 직무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법리이기는 하나, 검찰총장의 직무상 지휘는 대검의 소관 부서를 통해 수사를 담당하는 지방검찰청의 검사장에게 전달되어야 하며 이런 지휘체계가 정상적이다. 그러나 이런 지휘체계와 달리 대검찰청의 수장(首長)인 검찰총장이 그 소속 검사를 직접 지휘하여 수사를 진행한다면 일사불란한 수사에 상응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수사에 따른 지휘 책임은 고스란히 검찰총장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수사라는 것은 그 결과를 예측하여 벌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결과가 있을지 도사 같은 점쟁이가 아닌 한 결과를 알 수는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수사라는 것인데, 검찰총장이 직접 나서서 칼을 휘두른다고 해서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국민은 칭찬에 매우 인색하다. 성정이 극히 괴팍하여 사소한 잘못을 크게 꾸짖을망정, 역사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수사 공적에 대하여는 이를 당연히 여기고 한마디의 칭찬도 없다. 그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국민의 속성이다.

 

칭찬받을 일은 별로 없고, 비난받을 가능성, 아니 개연성만 존재하는 이런 수사라는 이름의 검찰 활동에 검찰총장이 직접 뛰어드는 것이 곧 중앙수사부의 수사이다. 지방검찰청의 수사가 잘못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검찰총장의 책임으로 귀속될 것이다. 그러나 중앙수사부의 수사 결과는 최종적이고도 직접적이므로 이것이 바로 중앙수사부의 아킬레스건이다.

 

대검 중앙수사부는 총장 직할 수사기구
대검의 수장인 총장이 직접 수사 지휘
날카로운 뿔과 송곳니를 함께 지녀
결국은 검찰의 아킬레스건으로 되어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서 폐지 건의

2013년 4월 중앙수사부 현판 내려
창설 만 32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재임 기간은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
재임 7개월간 장관 4명·총장 3명 모셔
시절을 잘못 만난 ‘중앙수사부장’으로


옛말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했다. 입술이 없으면 찬바람에 곧바로 이가 드러나 시려 오는데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중앙수사부란 수사기관은 장수(長壽)를 바라기 어려운 것이 그 태생 한계였다.

 

검찰총장을 향해 직접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려고 잠정적으로 수사기획관 제도를 마련하여 입술 역할을 맡기려 한 것이 나의 대검 차장검사 시절의 생각이었으나 다가오는 크나큰 시련을 오래도록 막을 수는 없었다.

풀을 먹이로 삼아 되새김질하는 소와 양 같은 초식동물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없는 대신에 적을 물리칠 강건한 뿔이 있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은 살을 물어뜯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으나 뿔이 없다.
검찰이란 수사기관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국민은 날카로운 송곳니와 무서운 뿔을 함께 가지고 태어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을까? 아마도 전대미문의 괴수(怪獸)로 생각했을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이리하여 화려한 명칭으로 막강한 수사력을 한껏 발휘하던 중앙수사부는 20세기 말의 화석(化石)으로 역사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


중앙수사부장 시절 나의 업무 일지는 두 권으로 나누어 적혀 있다. 1992년과 1993년의 검찰 업무일지가 그것이다. 이 두 권을 새삼스럽게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감회가 새롭다. 내가 이 중앙수사부장 편의 글을 쓰면서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이 시절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검찰의 숙원이라고 할 만한 검찰총장 임기제가 정착되려면 검찰총장이 그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명예롭게 퇴직하여야 함이 너무도 당연하다. 더구나 임기제 검찰총장의 임기 만료 직후 정권이 바뀌도록 예정되었으므로 더욱 그렇다. 이런 때에 검찰총장의 직접 수사기구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대형 범죄 사건 수사에 휘말려 작은 흠집이라도 남긴다면 검찰총장으로서는 참 난감한 처지에 이를 것임이 불문가지다. 그가 내게 특별히 당부한 사실은 없으나 내가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고, 스스로 검찰총장이 무사히 임기를 명예롭게 마칠 수 있도록 철저히 보좌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구영 검찰총장의 퇴임 전까지 중앙수사부에서 수사 또는 지휘한 사건으로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대형 사건이 여러 개 있어서 이에 관한 내용이 내 업무일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나 여기에 쓸 필요는 없다. 국민의 칭찬을 받은 바 없으나 사소한 질책도 받은 바 없기 때문이다. 일선 지방검찰청에서 벌이는 각종 수사 상황을 철저히 점검하여 국민의 어떤 질책도 받지 않도록 철저히 지도·감독하는 것이 중앙수사부 본연의 임무라고 다짐하면서 업무를 추진했다.

이미 법무 검찰 수뇌부의 이동 내용에서 본 바와 같이 나의 중앙수사부장 재임 기간은 말 그대로 참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내가 서울지방검찰청의 특별수사 제3,·제1부장을 역임하는 동안 이종남 검사장께서 나를 보고 ‘시절을 잘못 만난 특별수사부장’이라고 적절히 지적하였듯이 이 시절의 중앙수사부장 역시 ‘시절을 잘못 만난 중앙수사부장’이 틀림없을 것이다.

지방검찰청의 특별수사 담당 부장검사들만을 따로 불러 모아 전국 특별수사부장 회의를 여러 번 개최하여 일선 수사의 감독 기능을 강화하는 데 힘써 그들의 수사 능력을 함양시키는 데만 총력을 기울였다.

국민은 특별수사에 대한 칭찬에 인색하였으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일선의 특별수사부에서 보람된 수사 결과를 이루어 냈을 때는 기대 이상의 격려를 해 주었다.

 

나는 상사의 수사정보비라는 돈주머니를 털어 가는 재주가 남다른 사람이었다고 자부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은 적은 없으나, 말 몇 마디로 상사의 돈주머니를 뒤져 거금을 꺼내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검찰 후배가 쓴 글을 읽어 보았더니, 자신이 일선 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에서 가짜 산삼 사건을 수사할 때, 그 가짜 산삼을 살 돈이 없어 수사가 난관에 봉착할 즈음, 대검 중앙수사부장이 거금을 선뜻 내려보내 그 어려운 수사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는 서영제 전 서울지검 검사장이다. 나는 기억에 남은 것이 전혀 없고, 그 일도 나의 업무일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가 거짓말을 만들어 글을 썼을 리 없으니 내가 이런 말을 남기는 것이다.

내가 일선의 특별수사에 각별한 신경을 쓰며 지내면서도 과학수사 장비의 확충과 효율적 운영에 나름대로는 총력을 기울였다. 통신기획위원회라는 명칭의 검찰 협의기구를 만들어 검찰의 통신장비를 개선·확충해 가면서 통신수단의 혁신을 이루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업무일지 곳곳에 적혀 있다.

손에 쥔 핸드폰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오늘과는 전혀 다른,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에 검찰 자체의 무선통신 기능이 신종 도깨비로 등장하던 옛날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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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앙수사부장직에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전보된 후, 나와 함께 중앙수사부에서 근무한 간부들이 내게 전달해 준 1993년 3월 17자로 제작된 나의 중앙수사부장 재직기념패에 새겨진 명단은 다음과 같다.

수사 제1과장 김영철(金永喆). 수사 제2과장 김학재(金鶴在).
수사 제3과장 정홍원(鄭烘原). 수사 제4과장 배재욱(裵在昱).
과학수사지도과장 안대희(安大熙). 과학수사운영과장 조재천(趙在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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