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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판례

조정절차에 불응한 승소당사자의 소송비용상환청구권 인정 여부에 관한 영국 항소법원 판결

- Halsey v Milton Keynes General NHS Trust [2004] EWCA Civ 576; [2004] 1 W.L.R. 3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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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안의 개요 및 항소 이유

Halsey(H)는 남편이 M종합병원으로 이송된 지 이틀 후에 사망하자 그 원인이 의료진의 과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송대리인을 통하여 M종합병원 NHS Trust(M)에 손해배상을 구하는 조정안을 제시하였다. M이 책임을 부인하면서 H의 반복된 조정절차 참여 요청을 거절하자, H는 M에 대하여 사망 위자료 등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1심 법원(Milton Keynes 지방법원)은 H의 청구를 기각하고, H가 M의 소송비용을 부담하여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H는 위자료 청구 기각에 대해서는 다투지 아니하고 M이 조정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하였음에도 자신에게 소송비용 부담을 명한 것은 법리오해(err in law)라고 주장하면서 항소법원(Court of Appeal)에 항소하였다.


2. 쟁점 및 항소법원의 법리

영국 법원은 소송비용 부담의 주체, 액수 및 지급시기를 정할 재량을 가지고 있다. 원칙적으로 패소자가 승소자의 소송비용을 부담하지만 법원은 당사자의 소송 중 또는 소제기 전의 행위 등을 고려하여 달리 정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쟁점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우에 조정(mediation) 등 소송대체적 분쟁해결(ADR) 참여를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승소당사자에게 불리하게 소송비용에 관한 결정을 할 수 있는가이다.

(1) ADR 활용의 권유

영국 민사소송규칙(CPR)은 적극적인 사건관리를 통한 적정한 사건처리를 법원의 의무로 규정하는데, 적극적 사건관리란 법원이 적합한 사건에서 당사자들로 하여금 ADR 절차를 활용하도록 권유하고 촉진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당사자들은 ADR을 시도하는 동안 소송절차의 중지를 신청할 수 있다. 영국 정부는 2001년 "상대방이 수용하는 적절한 모든 경우에 ADR이 고려되고 사용될 것"이라고 공약하였고, 영국 보건서비스 소송국(NHSLA)도 조정과 ADR을 더 많이 활용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법원이 당사자들의 의사에 반해서 조정을 신청하도록 명령할 권한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법원이 당사자들에게 조정에 응하도록 강력하게 권유(encourage)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법원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당사자에 대하여 사건을 조정에 회부하도록 강요(compel)하는 것은 사법접근권(access to the court)에 대한 수용불가능한 제한이 되어 EU인권협약 제6조에 위반될 수 있다. 만일 법원이 당사자들이 반대하는 조정절차에 들어가도록 강요하게 된다면, 당사자들이 비용부담을 증가시키고 판결을 늦추게 되며 ADR의 장점들마저 손상시킬 수 있다.

(2) 소송비용 쟁점

CPR은 소송비용에 관한 명령을 함에 있어서 법원은 당사자의 행위(conduct)를 포함한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여기에는 "소송절차 중은 물론 그 이전의 행위, 특히 당사자들의 관련된 소송 전 규약(pre-action protocol) 이행 정도"가 포함된다고 규정한다. ADR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승소당사자가 소송비용의 일부 내지 전부를 상환받지 못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원칙에 대한 예외이므로, 그 이유에 대한 증명책임은 패소당사자가 부담하고, 승소당사자가 ADR 참여를 비합리적으로(unreasonably) 거부하였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비롯한 모든 제반사정이 고려되어야 한다.

(a)
분쟁의 성격(nature of the dispute). 당사자들이 장기계약에 따른 계속적 거래관계에 필수적인 법률쟁점에 대해 판단받기를 원하는 경우, 사건의 쟁점이 해당 업계나 시장 참여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중요한 경우, 구속력 있는 선례가 유용하다고 보이는 경우는 조정에 적합하지 않다. 사기적 행위 등과 관련된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b)
사안의 승소가능성(merits of the case). 당사자가 승소하리라고 합리적으로(reasonably) 믿는 것은 조정거절의 합리성과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승소가능성 없는 원고가 소송비용상의 불이익을 내세워 억지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공공기관은 이러한 위협에 취약하다. 그러나 자신이 반드시 승소하리라고 막연히(unreasonably) 믿는 것만으로는 조정거부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c)
다른 화해적 수단(settlement methods)의 시도 여부. 이 요소는 (f)에 포함된다.

(d)
조정비용(cost of mediation)이 과도하게 높은 경우. 당사자들은 조정절차에서도 대리인을 선임하고 결과에 상관없이 조정 수수료를 균등하게 부담하여야 한다. 최종적으로 승소하게 될 당사자로서는 불필요한 조정비용을 부담하게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고려 요소가 된다.

(e)
지연(Delay). 뒤늦게 제안된 조정절차 제안을 받아들이면 소송절차가 지연되기 때문에 역시 고려 요소이다.

(f)
조정의 합리적 성공가능성(reasonable prospect of success). 당사자의 협상에 대한 의지, 사건의 난이도, 조정인의 능력이 모두 고려요소가 될 수 있다. 조정의 객관적 성공가능성을 결정적 요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가령 A가 비합리적인 주장을 고집한다면 법원의 관점에서 조정의 성공가능성은 낮지만, 이것이 A의 조정거부를 합리적이라고 볼 정당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A가 승소하였더라도 자신의 비합리성에 의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볼 때 조정의 승소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만을 고려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조정의 성공가능성에 대해서도 패소당사자가 증명책임을 부담한다.

나아가, 승소당사자가 법원의 조정권유에도 불구하고 조정절차에 응하지 않는다면, 조정거절이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함에 있어서 고려요소가 될 수 있다. 조정권유가 강할수록 패소당사자로서는 승소당사자의 거절이 비합리적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용이할 것이다.

(3) 공공기관의 ADR에 응할 의무

NHSLA 등 정부기관의 ADR에 관한 공약은 적합한(suitable) 사건들에 대하여 ADR을 고려하고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ADR 절차에 적합하지 않은 사건의 경우에는 ADR에 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위 공약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


3. 항소법원의 판단: 항소기각

이 사안에서 법원이 조정을 권유하는 명령을 내리지는 아니하였고, 본질적으로 ADR에 적합하지 않은 사건도 아니다. 하지만 M은 청구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믿음에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었다. H의 대리인은 소 제기 전에 보건부 장관에게 M이 조정제안을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소송비용이 과도하게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으로 승산 없는 사건에서 조정을 통해 돈을 받아내려는 책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M은 조정비용이 청구금액이나 소송비용에 비하여 지나치게 크다고 보았는데 이는 조정참여에 반대할 근거가 된다. H는 조정이 성공할 합리적 가능성에 관한 증명책임도 다하지 못하였다. M은 H가 조정과정에서 남편의 사망경위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소를 취하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설득력이 없지 않다. 이에 반해 H는 조정성공에 대한 합리적 가능성을 전혀 증명하지 못하였다.


4. 평가

영국에서는 CPR, 소송 전 규약 및 관련 실무지침(Practice Direction)에서 ADR의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규정을 두고 있고, 법원은 승소당사자의 이러한 규정 준수 여부를 고려하여 소송비용 패소자 부담원칙에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 Hasley 판결은 이러한 예외의 인정요건으로 사법접근권 등에 근거하여 "승소당사자가 ADR 절차에 응하지 아니한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점"이 패소자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판시하면서 그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한 지도적 판결이다. 이에 대하여, 조정이 실패하더라도 소송복귀까지 단기간 소송절차가 중지될 뿐이므로 EU인권협약 제6조가 규정한 "합리적인 시간 안에 공정하고 공개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박탈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법원이 조정을 촉진할 의무를 부담하므로 패소자에게 승소자의 조정참여 거절이 비합리적이라는 점에 대한 증명책임을 부담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이 있다. Hasley 판결이 제시한 기준이 다소 엄격한 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법원에 의해 조정불참이 비합리적이라고 판단되어 소송비용상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정절차 참여를 거절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위험한 소송전략이다. 특히 영국에서는 소송비용에 산입되는 변호사보수가 특별히 제한되지 아니하므로 법원이 조정을 권유한 경우에는 당사자들이 유상의 조정비용을 감수하고도 조정에 참여할 유인이 작지 않다. 우리나라의 민사 사법제도는 빠르고, 저렴하며, 질적 수준도 높은 것으로 평가받아왔으나, 최근에 고난이도 사건의 증가로 인하여 1심 민사 처리기간이 장기화되면서 국민의 신속한 권리구제에 어려움이 야기되고 있다. 따라서 조정에 적합한 사건에 대해서는 조정을 통해 신속한 분쟁해결이 가능해지도록 재판과 조정을 아우르는 분쟁처리구조의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조정기구 재편 등 정적 구조의 개선은 물론이고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조정에 응할 수 있는 인센티브 구조의 마련도 요구된다. 이러한 필요성과 재판청구권의 적절한 조화의 관점에서 Hasley 판결은 우리에게 좋은 시사점을 제시한다고 본다.


윤찬영 선임연구위원(사법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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