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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불위’ 금감원 힘에 눌려 법치주의 멍든다

사법부 판결도 무력화… 금융권 승소사건에 ‘피해자에 배상’ 권고 경정

금융감독원이 은행 등 금융사들에 로펌에서 법률자문 받은 내역을 제출토록 해 '검사권 남용'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에 이뤄지는 의사교환 내용에 대해서는 공개를 요구하거나 증거로 활용하지 못하게 하도록 변호사법 등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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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치금융 문화가 판결·사법절차 압도 = 정부가 금융기관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관치금융' 문화는 현장에서 법치주의를 무력화시키기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12월 나온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의 키코(KIKO) 합의권고 결정이다. 환율변동에 따른 위험을 헤지(Hedge)하는 외환파생상품인 키코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로 인한 환율 급등으로 가입자들이 큰 손실을 입었다. 이에 많은 기업들이 키코를 판매한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이 2013년 "사기 상품은 아니지만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아 불완전판매가 인정된다"는 전원합의체 판결(2011다53683)을 내놓자 일선 법원은 이 전합 판결을 적용, 피해 기업들이 낸 소송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금감원은 대법원 판결 후 6년이 지난 시점에 새로운 분쟁조정위원회를 열고 신한은행 등 은행 6곳이 피해기업 4곳에 대해 손실액의 15~41%에 해당하는 255억원을 지급하라고 권고했다.

 

소멸시효가 이미 끝난 데다, 확정 판결까지 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금감원의 갑작스런 권고 결정은 무리수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우리은행은 결국 배상금 지급에 합의했다. 신한·하나·대구은행은 3개월째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KDB산업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은 금감원의 권고를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금감원이 사법부 판결을 무력화시킨 사례는 또 있다. 지난 2016년 대법원은 피보험자가 보험 가입 후 2년이 지나 자살했을 때 고의·자해 여부를 묻지 않고 '재해사망'으로 인정하는 사망 특약에 대해, 교보생명 등 보험사는 가입자에게 약관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되 소멸시효 2년이 지났다면 보험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다(2016다218713 등). 하지만 금감원은 이 같은 대법원 판결과 상관없이 보험금을 전액 지급하라고 권고했고, 2017년 보험사들은 어쩔 수 없이 소멸시효가 지난 보험금까지 지급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금감원의 힘이 너무 막강하다보니, 금융사들이 정상적인 사법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금피아'같은 비정상적 루트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한다"며 "피해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대법원 판결조차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금감원의 '힘자랑'을 속시원하게 여기겠지만, 결국에는 정상적인 법치주의가 자리잡지 못하게 만드는 폐단을 낳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강제적인 자료제출 요구는

사실상 영장주의 실질에 반할 수 있어

 

◇ '기울어진 운동장', '월권' 논란도 = 금감원과 은행의 '기울어진 운동장' 관계는 금융사를 고객으로 하는 로펌에게 큰 부담이다. 로펌들은 금감원을 대상으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소송을 진행할 경우 고객인 금융사가 행여 보복을 당할까봐 되도록이면 정면 충돌을 자제한다. 이 때문에 예민한 사항이 고스란히 담긴 자문내용과 자문비용 내역까지 그대로 규제당국의 손에 넘어가도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는 실정이다. 

 

금감원은 지난해 하나은행에 대한 해외금리연계 파생상품(DLF) 불완전 판매 관련 검사 기간 동안 '특정 로펌으로부터 3년간 자문을 요청한 내역 및 해당 로펌이 은행에 제공한 결과물 사본 일체'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은행과 로펌 측은 "포괄적인 자문내역 제출 요구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금감원은 오히려 자료제출 거부가 검사방해에 해당한다며 '기관경고', '과태료 부과', '관련 임직원 제재' 등의 처분을 내렸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금감원의 반강제적인 자료제출 요구는 사실상 영장주의의 실질에 반할 수 있다"며 "수사기관인 검찰의 압수수색영장 청구 요건조차 점점 까다로워지는 추세와 완전히 상반된다"고 비판했다. 

 

거칠 것 없는 금감원의 실력 행사는 종종 '월권'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금감원은 지난 1월 DLS·DLF 원금손실 사태와 관련해 우리은행이 DLF상품을 불완전 판매한 배경에는 경영진이 내부통제를 소홀히 한 측면이 자리잡고 있다며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문책 경고했다. 이에 손 회장은 서울행정법원에 문책경고 취소소송을 제기하고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도 냈다. 지난달 20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박형순 부장판사)는 손 회장의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등에 따르면 상호저축은행 외 금융회사 임원에 대한 문책경고 권한은 금융위원회에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현재 금감원은 가처분 인용결정에 대해 즉시항고한 상태다.


법조계

‘변호인-의뢰인 특권’ 명시적 도입

 변호사법 개정 강력 촉구

 

◇ "비밀유지권 확대 등 대안 모색해야" = 대한변호사협회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최소한의 비밀유지권을 보장해달라는 의견을 여러차례 금감원에 전달했다. 2015년 2월 위철환(62·사법연수원 18기) 전 협회장은 진웅섭 금감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금감원 종합검사시 금융기관이 받은 법률자문 내역, 법률의견서, 준법감시부를 포함한 임직원의 이메일 등을 요구하는 관행을 시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지난해 7월 현 대한변협 집행부도 검찰·경찰, 국세청, 금감원,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이뤄지는 의뢰인과 변호사간 비밀유지권 침해 실태를 공개하면서 시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변호인-의뢰인 특권(Attorney-Client Privilage, ACP)'을 명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아직까지는 수사나 공판 개시 전 일상적인 관계에서 변호사와 상담한 법률자문에 대해서는 공개를 거부할 수 있는 의뢰인의 특권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2009도6788). 하지만 법률자문의 중요성과 범위가 점차 확대되면서, 비밀유지권의 외연도 함께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제20대 국회에서도 ACP를 명시적으로 규정한 변호사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나경원 의원안, 유기준 의원안), 국회 임기만료로 곧 폐기될 처지다. 

 

이찬희(55·30기) 대한변협회장은 "로펌의 모든 자문내용을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검찰이나 경찰이 전국의 성당에 공문을 보내 모든 고해성사 내용을 제출하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위헌적인 발상"이라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변호사와 상담을 하는 순간부터 발생하며 수사·재판 개시 전이라도 형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변호사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의뢰인을 돕는 헌법상의 권리를 단지 행정편의적인 발상으로 짓밟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며 "구체적인 사례나 이의제기가 들어올 경우 협회 차원에서 강력하게 대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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