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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변호사협회

찬밥신세 ‘자기변호노트’… 현장에서 “그게 뭐지”

변협·경찰청 9월9일 업무협약 이후 이용실태 현장취재

경찰청(청장 민갑룡)이 지난 달 7일 전국 255개 경찰서에서 확대 시행한 '자기변호노트' 제도가 일선 경찰서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본보 취재결과 확인됐다. 경찰서 민원실 귀퉁이에 몇 부 방치돼 있는가 하면 정작 피의자 등이 조사를 받는 형사과나 수사과에는 자기변호노트가 비치조차 되어 있지 않은 경찰서도 있었다. 경찰청은 9월 9일 대한변호사협회와 업무협약을 맺고 자기변호노트 제도를 전국으로 확대 시행하기로 했었다. 경찰청은 본보가 취재에 들어가자 자기변호노트 제도 시행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점검 중이라며 피의자 인권과 방어권, 변호인 변론권 보장 강화를 위한 다양한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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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9일 이찬희 대한변호사협회장과 민갑룡 경찰청장이 전국 255개 경찰서에 '자기변호노트' 비치하는 내용이 담긴 업무협약을 맺은 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서울 주요 경찰서 5곳 가운데 1곳만 제대로 =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경찰서 가운데 하나인 서울 A경찰서를 지난 12일 찾았다. 형사과를 방문해 자기변호노트가 비치돼 있는지 묻자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소환 조사하는 피의자에게 자기변호노트를 설명하고 이용하도록 안내하는지 묻자 역시 "하지 않는다"며 돌아가라고 재촉했다. 21일까지 5곳의 서울 주요 경찰서를 방문해 자기변호노트 이용 실태를 조사했지만 형사과와 수사과 등에 자기변호노트를 비치하고 있는 곳은 송파경찰서 한 곳 뿐이었다. 강북의 B경찰서는 형사과나 수사과에는 자기변호노트가 없고, 민원실 데스크에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몇 부 놓여있었다. B경찰서 민원실장은 "필요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도록 데스크에 올려놓았지만 따로 이용 안내를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자기변호노트의 존재를 알려주는 안내 표지판이나 소환된 피의자 등에게 자기변호노트의 존재를 알려주고 이용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등 안내를 하고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민원실에만 몇 부 비치

이용안내 해주는 곳 없어

 

◇ 내부 홍보도 부족… 활용 '미미' =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처음 만든 자기변호노트는 피의자가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조사내용을 기록할 수 있는 메모장이다. 피의자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는 기록을 남겨 추후 변호인이 선임됐을 때 짜임새 있는 변론이 이뤄질 수 있도록 고안됐다. 피조사자의 방어권을 강화하고 인권보호 기능도 수행하는 등 순기능이 많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에 경찰청은 대한변협과 업무협약을 맺고 지난달 7일 자기변호노트를 전국 255개 경찰서에서 확대 시행했다.

 

그러나 확대 시행한 지 50일가량 된 지금도 자기변호노트는 일선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경찰 내부 홍보도 잘 이뤄지지 않아 일선 경찰관 중에는 자기변호노트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본보가 확인한 모 지방경찰청 작성의 '자기변호노트 제도 대국민 홍보강화 계획'에는 "수사현장에서는 (자기변호노트에 대한) 관심 부족 및 부수적인 업무로 인식하는 경향이 여전하다"고 기록돼 있다. 

 

최근 서울 C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한 피의자는 "형사에게 자기변호노트가 있느냐고 물어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게 뭐냐'고 되묻더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C경찰서 관계자는 "자기변호노트에 관한 구체적인 활용 지침이나 용례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라며 "아직 시행 초기라 형사들에 따라 안내를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등 편차가 조금씩 있는 것 같다"고 해명했다.

 

정작 피의자 조사받는

형사·수사과 보이지도 않아

 

◇ "피의자 방어권 보장 위한 당연한 권리" = 경찰은 또 자기변호노트 이용 안내에 소극적인 배경으로 상대편 사건 당사자의 불만을 꼽기도 한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난해 경찰서 5곳에서 자기변호노트 제도를 시범실시했던 시기에 한 달 정도 피의자에게 적극적으로 자기변호노트의 존재를 알려주라는 방침을 세운 적이 있다"면서 "그런데 고소인 측이나 참고인 등 상대편 당사자들이 '객관적으로 수사를 해야 할 경찰이 피의자를 너무 두둔하는거 아니냐'는 지적을 쏟아내 어쩔 수 없이 방침을 철회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법조계는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이다. 피의자의 방어권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보장된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왕미양(51·사법연수원 29기) 대한변협 사무총장은 "자기변호노트는 형사소송법상 보장된 방어권을 피의자가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며 "변호인조차 없는 상황에서 피의자에게 메모할 기회를 보장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고소인 등이 '편파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피의자 방어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희균 서울시립대 로스쿨 교수도 "조사 받는 피의자는 수사 담당자가 질문하는 맥락을 파악하면서 방어를 해야하기 때문에 메모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나아가 딱딱한 작은 철제 의자와 같이 조사 대상자를 위축시키는 여러가지 요소를 배제해 나가는 방향으로 수사방식이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승재현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자기변호노트를 안내하지 않은 이유가 피해자 측 항의때문이라는 경찰의 답변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며 "형사소송법이 (피의자의) 진술거부권을 보장하고 있고, 변호인 참여권도 인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권리 안내는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라고 했다. 


일선 경찰관 중에는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 경찰, 활성화 방안 고심… "우수사례 배포할 것" = 경찰도 자기변호노트 제도 활성화 방안 마련에 들어갔다. 경찰은 지난 달 23일 '국민중심 수사'를 대대적으로 선포하면서 자체적인 수사개혁보고서('경찰수사를 새롭게 디자인하다')까지 낸 상황이다.

 

경찰청은 본보가 취재에 들어가자 "8개 지방경찰청 17개 경찰서를 직접 방문해 자기변호노트의 비치 상태를 점검했다"며 "경기북부지방경찰청의 활용 방안을 우수사례로 선정해 이르면 이번 주 전국 경찰서에 배포·하달할 예정"이라고 21일 알려왔다. 

 

경찰청이 선정한 우수사례에는 △출석요구서에 자기변호노트 안내문 게재 △QR코드 제작 △자기변호노트 교육 강화 △카드뉴스 등을 이용한 다각적 홍보 활동 전개 등이 포함됐다. 특히 자기변호노트를 곧바로 내려 받을수 있는 QR코드를 출석요구서나 홍보 포스터 등에 부착해 피의자가 미리 자기변호노트를 출력해 경찰 소환조사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

 

경찰도 활성화 방안에 고심

 우수사례 배포 등 나서

 

경찰청은 또 같은 날 별도의 보도자료를 내고 피의자가 자기변호노트와 메모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책상이 부착된 접이식 의자나 책상받침대를 제공하는 등 조사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노트북 등 전자기기 사용이 보편화된 점을 고려해 변호인이 '간단한 메모 목적'으로 전자기기를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시범운영할 예정이라고 했다.

 

경찰청 수사제도개편팀 관계자는 "조사 시작 전 피의자에 교부하는 '피의자 권리 안내서'에는 이미 자기변호노트에 관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며 "자기변호노트 활용과 관련해 전국 경찰서에 대한 현장 방문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고, 적극적인 활용사례를 공유해 제도가 잘 정착될 수 있도록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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