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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와 영화 사이… ‘1987’ 그 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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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민주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8일 개봉 12일만에 관객 400만을 돌파하며 법조계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는 서슬퍼렇던 군부 독재시절, 경찰 조사를 받던 스무살 대학생의 죽음으로 시작해 민주항쟁이 촉발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영화인데다 당시 고문치사를 밝혀낸 검사들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어 실제인물들이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제(Nonfiction)인지를 두고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화는 시계의 초침소리를 타고 1987년 당시로 돌아간다. 서울대 언어학과 재학생 박종철이 경찰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87년 1월 14일 사망에 이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고문치사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경찰은 다급히 검찰청에 찾아와 박종철의 시신을 곧바로 화장할 수 있도록 지휘해달라고 하지만 담당 검사는 이를 거부하며 시신 보존명령과 부검을 지시한다. 이 검사는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던 최환(75·사시6회) 검사다. 영동 출신으로 전주고를 나온 최 검사는 박군의 사망을 둘러싼 수많은 외압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원칙을 고수하며 부검을 관철시킨다. 영화에서 최 검사의 지휘로 이뤄진 부검에 참여한 평검사는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뒤 창원시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안상수(72·사법연수원 7기) 검사였다. 

 

영화 속에서 최 검사는 이 사건으로 사표를 내고 변호사로 개업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조금 다르다. 최 검사는 이듬해 서울지검 남부지청 차장검사를 지내고 이후 '검찰의 빅4 요직' 가운데 대검 중수부장을 제외한 대검 공안부장과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지검장 등 3자리를 거쳤다. 그는 부산고검장을 마지막으로 검찰을 떠나 99년 개업했다. 

 

영화에서는 최 검사가 박종철 시신 부검을 강행하기가 어려워지자 언론을 통해 사건을 이슈화하는 장면도 나온다. 최 검사가 이홍규 당시 대검 공안4과장에게 박종철 사망 사실을 흘리고, 그 사실이 기자에게 전해져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당시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로 사건을 처음 보도한 신성호 성균관대 신방과 교수는 2012년에서야 논문을 통해 이홍규 과장으로부터 사건을 처음 전해들은 사실을 밝혔다. 당시 대검 공안 1,2,3과장은 검사가, 4과장은 자료과장으로 검찰일반직이 맡던 때였다.

 

시신 부검이 집행된 후 영화 속 최 검사는 사표를 내고 검찰을 떠난다. 영화에서는 이후의 이야기가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부검 이후 수사에서 배제된 최 검사의 뒤를 이어 서울지검 형사2부가 수사팀을 꾸려 고문치사 의혹 사건의 진상 규명에 나선다. 당시 서울지검 2차장검사였던 고(故) 서익원 차장과 함께 앞서 부검에 참여했던 안상수 검사, 수사팀 최고참으로 훗날 헌법재판관을 지낸 신창언(76·사시3회) 형사2부장과 현재 대법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박상옥(62·11기) 검사가 수사팀 일원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경찰 수사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조사가 이뤄졌다. 경찰 자체 수사 후 2명이 구속송치됐지만, 이들이 진범이 따로 있다며 말을 바꿔 수사가 지지부진하던 상황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공범이 더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 3명이 더 구속됐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제단에 의해 경찰 대공수사간부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은폐 축소 지시를 한 사실이 또다시 폭로되자 이번에는 서울지검이 아닌 대검 중앙수사부로 사건이 넘어가게 된다. 이때 수사에 참여한 검사들은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이진강(75·사시5회) 당시 중수1과장과 대법관을 지낸 강신욱(74·사시9회) 중수2과장이었다. 이들은 3차 수사로 은폐조작에 가담했던 박처원 치안감과 유정방 경정 등을 구속했다. 이후 부검의였던 황적준씨의 일기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이 허위 부검서를 종용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988년 1월 강 전 본부장까지 구속되고 수사는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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