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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법조회고록

[나의법조회고록] 김일두 변호사 ① 언론사·야당 간부 심야폭파테러 사건

김일두 변호사 제3178호

언론사 간부들 집 잇따라 테러…야당·언론 탄압사건으로 정치 문제화
군인을 용의자로 지목, 본격 수사하자 검사 집에 기왓장이 날아들기도
범인 잡지 못한 채 수사본부 10여일 만에 해체, 사건은 영영 미궁 속으로

1965년9월8일 자정,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였던 변영권씨 집에 정체모를 폭발물이 터져대문이 부서졌다. 또 거의 같은시각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동화씨 집에도 괴한이 나타나 짚차로조씨를 납치해 갔으며, 민주당 당무위원장 유옥우씨 집 울타리에서도 폭발물이 터져 아이들 공부방과 가정부방의 유리창 40여장이 깨지는 등의 소위'심야폭발물 테러사건'이 성동구 성수동과성북구 종암동에서 연달아 일어났다.

내가 서울지검 차장검사로 근무한지 1년이 좀 못된 시기에 터진 이 사건은 야당을 탄압하고야당편의 언론보도를 방해하기위한 소행이라고 하여 크게 정치문제화 되어 국회에서는 정일권 국무총리를 불러 진상을 따졌다. 또 박정희 대통령도 테러배후자를 엄중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사건으로 양찬우 내무부장관이 인책을 당하는 등 정치적으로시끄러워지자 결국 박 대통령은檢·軍·警합동수사로 사건전모를 조속히 밝혀내라고 지시했다.그래서 법무·국방장관과 검찰총장, 치안국장, 육군헌병감 등치안관계자가 긴급 회의를 열어檢·軍·警합동수사반을 구성하고 그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당시 서울지검 차장검사인 내가 지명됐다.

차장검사실에서 기록이나 보면서 결재사무를 보고있던 나에게는 정말 막중한 책임이 지워진임무였다. 왜냐하면 일반인 중 테러범인을 색출해 체포하는 것이아니라 어떤 기관원일지도 모를범인을 잡아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검찰내부에서는 물론이고 온세상사람들이 김일두 수사본부장이 과연 범인을 잡아낼 것인가, 못잡아낼것인가에 관심을 모았다.나는 곧 박영수 치안국장과 이광선 헌병감 그리고 정치근 수사반 검사, 서울에서만 줄곧 20년간 수사를 해온 윤현용 경감 등과함께 테러범 수사에 착수했다.그러나 수사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수사 시작전에 나는 합동수사본부 건물을 알아보기 위해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내방을 철통 같이 포위하고 있던 각신문사 기자와 통신사 기자들 때문에 방문앞을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꾀를 내어 상의를 방에 걸어둔 채 변소에가는 척하고 내 전용차가 아닌 다른 차를 타고 청사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런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신문사 깃발을 단 차량 수십대가 나를 뒤따랐다. 나는 취재차량들을 따돌리기 위해 교통신호에걸리게도 해보았으나 취재차량들은 신호위반을 하면서까지 내가타고 있는 차를 바싹 따라왔다.

나는 어쩔수 없이 치안국장실로 들어가 국장실 안쪽에 있는 비밀실로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리고 나서 비서를 시켜 기자들에게내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고 알려주도록 지시했다. 후에 비서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이를 못 믿어한 기자들은 다짜고짜 국장실까지 쳐들어와 눈으로 확인하고는 나를 놓쳤다며 원통해 한 뒤다시 검찰청으로 돌아와 내 방문앞을 지키더라는 것이었다.

그 후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신문사 社旗를 단 취재차량10여대가 내가 어디를 가든지 뒤따라 다녔다. 어느날에는 기자들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하루저녁에 여관을 두 번씩이나 옮겨야만 했다.

또 문을 잠그고 하는 실내수사에는 복도와 그 앞거리를 가득 메운 각 신문사 합동취재반원들이취재마감시간이라며 고함을 지르면서 문이 부서져라 두드려 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내가 테러를 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실외로한발짝이라도 나가면 붙들리기때문에 나는 할 수없이 실내에 양동이를 갖다놓고 소변을 봐야하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이 언론인에 대한 테러사건인지라 전 매스컴이 톱뉴스로다루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날마다 내 사진과 수사상황이 신문과 TV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고있어 범인을 못잡을 경우에는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을 것이 분명하니'高名은 告命이고 無名은 撫命이다'라는 抱念이 새삼스럽게절감되어 더욱 초조해지기만 했다.

그러던 중 수사는 합동수사반원들의 노력으로 급진전돼 3명의군인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그 무렵 합동수사반의 정치근검사집에 느닷없이 기왓장이 날아들었는가 하면 윤현용 경감도취재기자를 피하려다 자동차에치어 골절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또 정체불명의 사람이 합동수사반원들을 미행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는 등 여기저기서 불안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루는 조사받기 위해 수사반에 출두한 군인이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당당히 수사본부장실로들어와 나와 수사반원들을 긴장시킨 일도 있었다.

이 때부터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몸 조심하이소"라는 말이 인사말처럼 되었다.심지어 법원과 검찰 동료들 사이에선"저 친구가 범인을 잡아돌아오느냐, 관속에 담겨 오느냐둘중 하나일테지"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잇따른 불상사가 수사에도 영향을 준 것일까? 용의선상에 올라있던 군인 3명중 1명은 알리바이를주장했고 다른 2명은 이미 월남에파병되어 수사를 더 이상 진행시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나는 의욕만 앞선 채 범인을 잡지 못하면서 날짜만 보내다가 합동수사를 개시한지 11일만에 결국 합동수사본부의 해체를 건의하고 이를 단행했다. 패전장군처럼 쓴맛을 다시며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운전수는"날마다 따라다니던 10여대의 기자차가 한 대도 안 따라오니 서운합니다"라고 말해 나또한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 후 합동수사본부의 해체가다시 정치문제로 비화되어 정일권 국무총리는 합동수사반을 재편성해 수사를 계속하라고 지시했고 국회에서는 특별조사단을구성하는 등 일이 더욱 시끄럽게전개되었다.나는 재구성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재취임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나로서는 그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정부는 합동수사본부의 강화를 위해서라도 검사장이본부장을 맡아야 한다며 이봉성검사장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임명하게 되었다. 차장검사인 나의 거부로 인해 검사장을 본부장에 취임케 한 것은 지금도 미안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가 어려워진 시점에서 수사본부의 재출발은 큰 의미가 없었고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영영 미궁으로 빠지게 되었다. 미국 케네디대통령 암살범인이 잡히지 못한것처럼 당시 미해결로 마무리된이 심야폭발물 테러사건은 그 해매스컴 상에서 10대 뉴스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나는 검찰이 합동수사본부의수사지휘권자가 되어야 한다 해도 왜 하필이면 내가 그 사건의본부장에 지명되어 쓴맛만 보는수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가라는생각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바없이 갖고 있다. 하여간 그때에검사로서 수사의무를 다해내지못한 一大汚點을 남긴 것이라고 自認하나 당시 세인들은 우리의 수사로 그 범인이 어디에있는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것쯤은 다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생각하며 한편으로는 自慰도 한바 있었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