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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법조회고록

[나의법조회고록] 김일두 변호사 ② 육영수 여사저격사건(上)

김일두 변호사 제3179호

74년 광복절기념식서 조총련계 재일동포 2세인 文世光의 총 맞고 운명
朴 대통령 매일 수사보고 기다리고 있는데 수사는 진전 없어 수사진 조급
鄭京植 검사가 인간적으로 대하자 범인 옥중수기 통해 범행일체 자백
 

1974년8월15일, 서울지검장이었던 나는 여름휴가를 받아 고향인 남해로 내려가 성묘를 한 뒤 서울로 올라오려고 짐을 꾸렸다. 나는 잠시 읍내다방에 들렸는데 텔레비젼에서는 朴正熙 대통령 내외와 각계각층의 귀빈들이 참석한 광복절 기념행사가 중계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텔레비젼 화면이 흔들리더니 꺼져버렸다.            

나는 '방송국에서 화면조정을 잘못했나 보구나'하고 무심코 넘어갔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올라오는 중 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전주의 한 주유소에 들렸더니 오전에 서울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저격사건이 발생하여 영부인 陸英修 여사가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보통일이 아니구나"라고 직감한 뒤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가던 중에 라디오를 틀었더니 "오늘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있었던 저격사건에 대한 수사는 앞으로 서울지방검찰청이 수사본부가 되고 그 수사본부장은 서울지검장에게 맡긴다"며 "이번 사건을 맡은 金一斗 서울지검 장은 지금 고향에 갔다가 상경중에 있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 방송을 듣자마자 '중앙정보부 차장에서 검찰총장으로 와 있는 金致烈 총장은 남달리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에 국가원수를 저격하려던 사건이 발생한 즉시 수사본부를 경찰이 아닌 서울지검에 맡기고 그 본부장도 서울지검장이 맡아야 한다는 판단아래 즉각적인 조치를 취한 뒤 나의 행방을 알아보라고 한 것이로구나'고 짐작되어 차 머리를 동교동 우리집이 아닌 서울지검 청사로 곧장 향했다.       

내가 청사에 도착할 당시 언론에 보도된 사건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오전 10시23분, 장충동 국립극장에 朴 대통령 내외와 3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朴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중 돌연 방청객 뒤쪽에서 괴청년이 연단 쪽을 향해 박차고 일어나 朴 대통령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 첫번째 총알은 연설대의 상단부에 구멍을 냈다. 순간 朴 대통령은 단상 밑으로 몸을 낮추었다. 뒤이어 또 한발이 陸 여사의 오른쪽 머리를 관통했다. 이 괴청년은 연단위로 뛰어오르려고 했으나 대통령을 경호하던 경찰관들에게 잡혔다.'         

여하간 내가 서울지검에 도착했을 때에는 陸 여사는 병원으로 옮겨진 뒤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이날 오후 7시 서울대병원에서 운명했다. 또 객석 앞에 앉아 있다가 범인이 쏜 또 한발의 총탄에 맞은 장봉화 여학생도 거의 같은 시각에 숨을 거뒀다.          

나는 鄭致根 공안부장과 金榮秀 검사를 수사본부에 합류시키고 저격사건에 대한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수사본부로 송치된 범인은 '요시이'라는 가명을 쓰고 일본인 행세를 한 23세 청년으로 본명은 文世光이었다.        

나는 그가 조총련계에 속한 자라는 것을 직감했고 朴 대통령 내외를 저격하라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광복절을 기하여 범행할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한것이 틀림없는 것이라 생각됐다.         

그런데 文은 재일동포 2세로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라 통역을 통해 수사를 해야 했고 이로 인해 수사가 늦어졌다. 반면에 이사건의 직접적 피해자인 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수사결과를 날마다 보고 받고자 고대하는 까닭에 수사진의 마음도 날이 갈수록 조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文의 배후와 범행동기 등을 밝혀내야 할 처지였고 모든 언론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수사본부의 발표였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사상황을 진전시켜야 했다.         

우리는 文의 일본에서의 행적과 수사 용의선상에 나타난 재일조총련 간부 김호용 등과의 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수사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文은 끝까지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했고 그는 자신이 대통령 내외를 저격했던 것은 잘못이 아니라며 '전투하면 승리한다'는 전투선언문을 내어놓는 등 수사는 난조를 겪었다.          

그래서 나는 고심 끝에 수사의 보강을 위해 수사전담 검사를 더 충원하기로 결심하고 鄭京植 검사를 우리 수사반에 합류시켰다. 鄭 검사는 "서울구치소에서 文과 밤샘을 해 가면서라도 진상을 밝히겠다"며 단호하고 적극적인 수사태도를 보여주어 수사본부장인 나로서도 鄭 검사의 이런 자세가 고맙게 생각될 정도였다.            

鄭 검사는 文을 수사하면서 인간적으로 대하며 그의 마음을 울리게 해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옥중수기를 쓰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文이 쓴 옥중수기 첫머리에는 '이 수기를 고 육영수 여사와 장봉화 학생의 영전에 바친다'라고 시작되어 '자신이 조총련간부 김호룡으로부터 朴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조총련계가 운영하는 동경 아카후도 병원에 1개월간 거짓입원을 한 뒤 사격훈련을 받았으며, 오사카에 정박중인 북한공작선 만경봉호에 승선하여 세뇌교육을 받았다. 또 일본 모 파출소에서 스미스웨건 권총 1정과 실탄 5발을 훔쳐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감춘 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조선호텔 1030호에 '요시이 유키오'란 이름으로 투숙한 후 여기에서 범행을 준비해 왔다'며 자신의 범행과정과 배후 등을 소상하게 자백했다. 또 文은 수기 말미에 공산주의 이론의 모순성을 자각한 나머지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라면 사형이라도 감수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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