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소송당사자간 능력·경험 현저히 차이나는 경우에는…

"법원, 예외적으로 석명권 적극 행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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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여성이 다섯 살배기 딸에게 뇌진탕을 일으킨 변호사를 상대로 '나홀로 소송'을 벌이다 사실상 패소한 사건과 관련해, 재판장이 석명권을 적절하게 행사했는지 논란이 일고 있다.

 

변호사 A(33)씨는 2014년 12월 휴대전화 통화를 하며 서울 강남구 압구정 현대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출입문을 미는 순간 앞서 가던 B(5)양이 A씨가 민 출입문 손잡이 부분의 철제 프레임에 뒷머리를 부딪쳐 3주간 병원 치료가 필요한 뇌진탕을 입었다. 이에 B양의 어머니인 C씨는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법에 "치료비 등 4800여만원을 배상하라"며 A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그런데 법원은 B양의 치료비 등은 인정하지 않은 채 딸이 상해를 입은 데 대한 C씨의 정신적 피해만 인정해 위자료 300만원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사실상 패소 판결이나 다름 없었다. 이처럼 C씨가 딸의 치료비를 받지 못한 이유는 소장의 원고란에 딸은 빼고 자신의 이름만 기입했기 때문이다. 치료비를 청구하려면 사고의 직접적 피해자이자 관련 손해배상의 채권자인 딸 B양이 원고가 돼야 하는데 이를 몰랐던 것이다. 치료비 등 딸이 직접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딸인 B양은 원고로 하고, 자신의 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는 자신을 원고로 추가해 자신의 소송과 함께 딸의 법정대리인으로서 소송을 수행했다면 위자료와 함께 딸의 치료비 등에 대해서도 한꺼번에 판결을 받을 수 있었지만 법을 잘 몰라 반쪽짜리 판결만 받게 된 것이다.


30대 변호사가 밀친 백화점 출입문에

5세 여아 뇌진탕

 

재판을 담당한 판사가 석명권을 행사해 이 같은 사실을 C씨에게 알려주고 딸을 원고로 추가하도록 했으면 1심에서 문제가 해결 될 수도 있었지만, 담당 판사는 석명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당사자 일방에게 그 같은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은 민사소송의 원칙인 변론주의 위반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변론주의란 소송의 기초가 되는 자료를 수집하고 제출하는 책임을 당사자에게 맡기고, 법원은 당사자가 변론에서 주장·제출한 것만 재판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C씨와 같은 일반인이 분쟁의 법률적 쟁점을 모두 찾아 주장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를 알아서 수집해 제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억울하다는 하소연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송만 제기하고는 구체적 주장과 입증은 없이 재판장의 '현명한 처분'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당사자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민사소송법은 변론주의를 기본으로 채택하면서도 보완책으로서 재판부의 석명권을 인정하고 있다. 법원이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하기 위해 당사자에게 사실상 및 법률상의 사항에 관해 질문을 하고, 입증을 촉구하도록 하고 있다. 당사자의 주장이 모호하거나 모순이 있을 때 재판부가 질문해 주장을 정리하거나 주장·입증을 촉구 또는 당사자가 간과한 법률적 쟁점을 지적하는 석명권은 재판장의 권리이자 의무인 셈이다. 하지만 실제 사건에서 변론주의 원칙을 지키면서 적절한 석명권을 행사하기란 쉽지 않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석명권 행사는 당사자가 밝힌 소송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이뤄져야 하고 새로운 신청이나 주장의 변경을 시사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인데, 그 한계점이 명확하지 않다"며 "많은 판사들이 가지는 재판 진행상 고민 중 하나는 법정에서 '이 말을 해도 좋은지 하지 말아야 할지'를 정하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어머니가 치료비 청구 '나홀로 소송'서

사실상 패소

 

서초동의 한 변호사도 "법원의 적극적 석명권 행사는 재판 과정에서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결과가 될 수 있다"며 "이는 오히려 사법불신을 야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이찬희)도 지난 5월 서울중앙지법(원장 강형주)과 가진 소송절차개선연구협의회 간담회에서 "재판부가 변론주의를 침해하는 석명권 행사로 소송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양돼야 한다"며 "과도한 소송지휘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었다. 판사들 입장에선 해마다 법관평가를 하고 있는 변호사들의 주장을 가볍게 여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앞선 사례와 같이 당사자 간 소송 수행 능력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거나, 실수로 주장·입증 사항을 빼먹거나 누락해 억울한 사례가 발생할 우려가 큰 경우 등에서는 재판부가 석명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당사자 간의 대등한 공격·방어를 보장하기 위해 당사자의 능력과 경험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적극적인 석명권 행사를 허용해 실질적인 분쟁해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렇지 않으면 실체적 진실과는 명백히 다른 판결이 실제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선고돼 확정될 수 있다"며 "법원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채 변론주의를 기계적·형식적으로만 적용한다면 당사자의 소송수행능력 부족으로 승소할 사안임에도 패소를 당하는 폐단과 불합리가 발생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도 "변론주의는 소송수행능력이 평등한 쌍방당사자의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소송의 당사자는 평등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라며 "경제적인 이유로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소송에서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경우에 따라서는 적극적 석명권 행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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