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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60) 자하 대련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조선후기에 오면 청나라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새로운 학문의 흡수로 조선 사람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다. 이를 어떤 사람은 실학(實學)이라 하기도 한다. 학문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이 조금씩 변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대부분 정치인이지만 그 당시의 정치가는 모두 학문을 기저에 두고 과거를 통해 출세한 선비들이라 문학이 제일 먼저 반응하였다. 이 중에 문장(文章)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이요, 시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 또 글씨는 당연히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였다. 자하는 시를 잘할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써서 당시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라 불렀다. 필자는 여기에 하나 더 붙이고 싶은 것이 있으니 바로 수석(水石)이다.

이 중 우리가 보고 바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림이지만 그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글씨는 그나마 쉽게 볼 수 있었다. 자하의 글씨를 보면 바로 자하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금방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깔끔하고 예쁘고 부드럽다. 대단히 여성적 분위기의 글씨다. 글씨가 둥글한 것으로 보아 키도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며, 대단한 풍류남아가 아니었을까? 음악이나 골동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었고 서화와 인장의 소장도 수준급이었다 한다.

그런데 자하의 글씨는 또 다른 큰 특징이 있다. 해서체와 행서체의 차이도 그리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글씨가 크기만 다를 뿐 글씨의 모양새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또 자하는 전서나 예서를 거의 쓰지 않았다. 주로 거의 해행(楷行)이었다. 대련은 청나라 초기부터 유행한 하나의 격식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 이후부터 유행하여 자하와 추사가 꽃을 피웠다. 대련 글씨는 그 전부터 조금씩 쓰기 시작한 현액(懸額)과 더불어 하나의 고유형식이 되었다. 가로, 즉 옆으로 쓴 한 개의 현액과 세로로 내려 쓴 한 쌍의 대련은 누가 어떤 내용으로 어떤 글씨로 썼느냐가 그 집 주인의 품격을 나타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재료인 종이와 붓의 부족, 집의 구조 등 여려 조건이 중국과 달라 크게 발전할 수 없었다. 여기에 소개하는 작품인 '조화(造化) 선생(先生)' 대련은 평소 자하가 즐겨 쓰던 글씨의 특징이 덜 나타난다. 자하는 적잖은 대련이 남아있는데 이 대련처럼 두 배나 큰 글씨는 거의 처음 본다. 또 대부분 중국 운룡지(雲龍紙)나 옥판선지(玉板宣紙)에 쓴 글씨인데 이렇게 우리 한지에 쓴 글씨도 드물다.

하여 필자가 처음 이 작품을 볼 때 자하의 도장이 찍혀있질 않았다면 자하필체라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연구해 보면서 자하 글씨라는 확신을 가졌고, 또 자하의 장인인 송하옹 조윤형(松下翁 曺允亨: 1725-1799)의 글씨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울러 자하 글씨가 조윤형을 배워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그동안 자하는 글씨에 특별한 선생이 없었기에 글씨의 내력이 막연히 동기창(董其昌)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였는데 이 대련을 통해 조윤형을 통해 동기창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내용은 소동파(蘇東坡)의 시구(詩句)을 따다 썼다. '만년에는 도기 빗듯 학생들을 가르치고, / 봄이 오면 지팡이 집고 한가히 산보하네(年抛造化陶甄外, 春在先生杖?中). 필자는 이 글씨를 보면서 옛 그림이나 글씨를 감별할 때 처음 본다고 해서 함부로 쉽게 위작으로 결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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