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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57) 전주최씨 지천가 서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이 첩은 전주최씨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 1586-1647)과 그의 아들 후량(後亮: 1616-1693), 손자 석진(錫晉: 1640-1690), 증손 창헌(昌憲), 고손 수철(守哲: 1683-1712)까지 5대에 걸친 서간첩이다.

알다시피 지천은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로 활동하여 호란의 뒷수습뿐 만 아니라 많은 치욕을 당하면서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여 한 일이나, 당시 대명의리(大明義理)에 눌려 많은 마음고생을 한 분이다.
하여 척화파인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가서 갖은 고생을 하였다. 그 뒷바라지를 한 아들 후량과 동생 혜길(惠吉: 1591-1662)의 편지 속에 이런 상황이 나타난다.

지천이 7통, 최혜길 1통, 최후량 6통, 최석진 3통, 최석정 1통, 최창헌 3통, 최수철 3통이 실려 있다. 지천의 편지는 당시 예론(禮論)에 관한 사건에 대해 언급하기 어려운 상황에 관한 것, 심양에 잡혀있을 때 아들에 보낸 편지, 이 집안이 대대로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연구한 집안으로 한국철학사에서 매우 중요시 다루는데 이 첩에 양명학에 관해 논평한 한편의 글이 있다. 지천이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는 부분적인 글이나 일화는 많으나 확인할 구체적인 사료가 없는 시점에서 이 글은 매우 귀중한 철학 사료다.

서울에서 양명집(陽明集)을 펼쳐보니 그 학설이 크게 병통(病痛)이 있다. 다만 왕석담(汪石潭)과 윤언식(倫彦式)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글은 가장 뛰어난 내용이니 숙독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선유(先儒)의 하공(下功)은 거의 정처(靜處)로써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데, 홀로 이 늙은이(왕양명)의 학설에서 지금 염려가 되는 것은 동처(動處)에다 치지(致知)의 공(功)를 더하니 이른바 동무불화(動無不和)면 정무부중(靜無不中)이라고 한 말로 이는 바로 왕양명 일생의 득력처(得力處)니 슬쩍 보아 넘길 수 없다. <洛中披見陽明集 其學大有病痛 獨汪石潭倫彦式兩書 最其粹者 不可不熟看也 蓋先儒下功 頗有以靜處爲重者 獨此老之學 今於念慮 發動處加致知之功 所謂動無不和 則靜無不中云者 乃陽明一生得力處 不可忽也>

이렇게 양명의 장단점을 이야기한 후에 그의 다른 글을 읽어보면 공자 맹자의 본뜻을 잃은 것이 많고, 가볍고 과시하는 말이 있으나 작금의 성리학 말단의 폐해를 이로써 서로 구한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오로지 성리학에만 뜻을 두는 것만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끝을 이렇게 맺었다. '비록 크게 득력한 곳은 없다 하더라도 또한 강서신도(講書信道)한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후대의 평가는 대부분 안으로는 양명학을 신봉하였지만 겉으로는 성리학자로 행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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