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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54) 석애 기행시집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조선 후기에 오면 자주 외척의 세도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나라 어느 시대인들 정치를 하게 되면 끼리끼리 뭉쳐서 나라의 이득이 되든 개인의 이득이 되든 이득에 따라 어울리는 무리는 항상 있어 왔고 또 정치란 그런 것이라며 당연시 되었다. 한데 조선후기 즉 1800년부터 고종이 등극하던 1864년까지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독단 세도가 너무나 심했기에 외척세도란 말이 항상 따라다녔다. 이때 안동김씨 60년 세도에 잠깐 대항했던 외척세도가가 석애 조만영(石厓 趙萬永: 1776-1846)이었다.

석애의 누이동생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나중에 翼宗으로 추존: 1809-1830)의 비이자 조대비(趙大妃: 1808-1890)라 부르던 분이다. 석애는 동생이자 정치의 동반자였던 운석 조인영(雲石 趙寅永: 1782-1850)과 조선후기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기에 학문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대대로 가학이 끊어지지 않고 내려오던 집안이며 서화수장도 많이 하였고 그림과 글씨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었던 조선 중후기 문벌 좋은 가문의 하나였다.

이 석애 기행시집(石厓 紀行詩集)은 1832년 추석을 맞아 석애 조만영이 휴가를 얻어 선산이 있는 원주에서 배를 타고 성묘를 갔다 오며 지은 시 모음집이다. 2부로 나눠는데 앞에는 '기행(紀行)'이란 제목으로 36수의 오언 및 칠언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절반은 당시 시로서 이름을 떨치던 지원 조수삼(芝園 趙秀三: 1762-1849)의 시다. 두 사람이 서로 수창(酬唱)하며 갔다 온 것이다.

조수삼은 역관출신으로 지체는 미미하였지만 학식이 풍부하고 특히 시를 잘하여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석애 형제가 큰 후원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 기록으로 보아 그 사실이 틀림없을 것 같다. 뒤에는 '기행 칠언30수(紀行 七言三十首)'라 하여 석애가 성묘를 갔다 오며 보고 느꼈던 서른 가지를 칠언절구로만 지은 서정시다. 그 중에는 어느 지역을 읊은 頭彌峽/ 過龍津舊村 등이 있고, 또 어느 지역을 지나며 생각나는 사람을 읊은 懷鄭樵夫/ 弔楓溪老人墓, 풍습을 보고 읊은 機女(베짜기)/ 水確(물레방아) 등의 시들이 있다. 그리고 맨 끝에는 반쪽이 떨어져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없으나 미려한 글씨의 발문이 붙어 있다.

석애의 시를 평한 글의 내용으로 보아 한강가에 낙향한 대학자의 글이 아닐까? 이 시집 글씨는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석애 자신의 글씨일 것 같고, 무수한 권점(圈點)은 발문을 쓴 평자(評者)일 것이다. 석애와 지원,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도 시이지만 석애가 지은 30수의 당시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는 석애의 시문집이 전해지지 않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일 것이다.

양평 월계를 지나다 노비출신으로 시를 잘하여 당시에 다들 너무나 그 처지를 아까워했던, 나무를 해서 서울 동대문에 내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던 이름도 전해지지 않은 정초부(鄭樵夫)을 생각하며 지은 '회정초부'란 시는 이렇다.

월계에 사는 나무꾼이 시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려/ 종종 듣기로 산 귀신도 놀랬다 한다/ 아깝다, 그런 기재(奇才)가 궁하게 지내다 죽어/ 적막한 강가라 이름이 전해지지 않으니(月溪樵者以詩鳴, 往往聞之山鬼驚, 可惜奇才窮到死, 荒江寂寞不傳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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