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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53) 죽남서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조선역사에서 가장 슬픈 일은 병자호란의 치욕인데 그 당사자들은 어떠하였겠는가하는 생각을 하면 마냥 서글퍼진다. 이 당사자들 중에 글씨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삼전도 비문(三田渡 碑文: 三田渡淸太宗功德碑)을 쓴 죽남 오준(竹南 吳竣: 1587-1666)일 것이다.

"오준의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 본관은 동복(同福), 만취 오억령(晩翠 吳億齡)의 조카며, 선조 20년 정해(丁亥)년, 즉 1587년에 태어났고, 광해 무오년, 즉 161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사자관(寫字官)에 차출되기도 하였다.

오준은 "글을 잘하고 글씨도 잘 써서 삼전도비의 글씨를 썼으니, 그로 인해 한을 품고 죽었다"는 기록은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나오는 내용인데 "한을 품고 죽었다(抱恨而終)"는 한 마디가 당시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표현해 주고 있다.

종증손 되는 연초재 오상렴(燕超齋 吳尙濂: 1680-1707)의 인구에 회자되는 '삼전도시'는 이러하다.

석 자쯤 되는 이 오랑캐 삼전도비/ 외로운 성 포위 푼 것 생각나는구나/ 기막혀라, 천승의 나라로 이런 창피를 당하다니/ 한번 군대를 떨쳐 일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장수들은 별 계책이 없고/ 문장에는 시비만이 얽혔구나/ 조공 바치는 일은 옛날 그대로인데/ 이 나라 이 산천을 어디에 부쳐야 한단 말인가/

죽남은 한석봉의 글씨를 익혀 작은 글씨는 서로 구별하기 힘들다. 하여 석봉이 죽은 후에 많은 비갈을 도맡아 썼으며 그런 상황에서 서로 쓰지 않으려는 항복비문 글씨를 쓰게 되어 전하는 말에는 오른손을 잘랐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죽남은 작은 해서만 비슷할 뿐 큰 글씨나 행초서는 꽤 차이가 느껴진다. 누가 죽남 글씨를 평해 '체재(體裁)가 토실토실 살졌다'고 했는데, 이 말이 정확한 지적인 듯하다. 죽남의 조금 큰 글씨를 보면 석봉글씨보다 살이 쪄 있고, 또 글씨가 커지면서 전체적인 짜임새가 떨어지고, 수필(收筆; 붓을 거두어 들이는 법)이 자연스럽지가 않아 매우 어색해 보이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죽남서첩은 죽남이 75세 되던 1661년(현종 2년) 4월 그믐에 어떤 사람에게 써준 것인데 받은 사람의 이름을 지웠다. 아마도 받은 사람의 후손이 이 첩을 양도하면서 이름을 지운듯하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중국의 왕희지가 어떤 도사에게 황정경을 써주고 거위와 바꿨다는 황정환아(黃庭換鵝)의 고사와 서예사에서 중요시하는 화악묘비(華嶽廟碑)와 예학명을 나타내는 "황정환아화악예학" 여덟 자를 앞에 크게 쓰고, 그 뒤로 여섯 가지 서체(六書體)에 대한 것, 한나라의 채옹(蔡邕)이 신인으로부터 필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 중국 역대 서예가와 그 글씨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와 당시(唐詩)를 쓴 첩이다. 총 50면으로 된 이 첩의 특성은 아주 큰 글씨는 없지만 죽남의 현판 글씨를 빼 놓고는 앞의 손바닥 크기만 한 8자부터 볼펜글씨처럼 작은 잔글씨가 골고루 섞여 있는데다가 해서(楷書)와 행초서(行草書)를 볼 수 있어서 죽남의 진면목을 얼추 알 수가 있다는 점이다. 또 총 48면의 글씨 외에 첩 제일 앞과 맨 뒤 2면에는 검은 바탕색으로 된 종이에 '화조도(花鳥圖)'와 '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가 그려져 있다. '선동취적도'에만 화제와 저옹(杵翁)이란 이의 관지가 있는데 그림이 범상치 않다. 이 첩의 소장자가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인데 혹 표암과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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