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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52) 한거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어떤 경매의 미리보기에 갔다가 우연히 이 그림을 구경하다 그림보다도 그 앞에 쓴 글이 마음에 들어 후에 경매에 응찰하여, 결국 내 사무실에 걸어 두고 보는 그림이 바로 이 한거첩(閑居帖)이다. 작가가 누구인지 아직 밝히지는 못했지만 오는 사람마다 각기 자기 나름의 의견을 내놓아 한 켠으로는 재미도 있다. 그 그림속의 인물이 꼭 연객(煙客; 許?)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똑같다는 둥, 그 나무의 모습은 단원(檀園: 金弘道)의 필치와 비슷하다고 하는 분도 있다. 이 앞에 쓴 제기(題記)의 내용은 이렇다.

"내가 하곡(荷谷) 옛집에 한가히 쉴 때에 의재(宜齋)가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와서 틈이 있을 때 그림을 그려 달라 청한다. 생각하니 내 나이 13~14세 때부터 우연히 이 일(그림)을 익혔다가 그 사이 10여 년간 여러 사정으로 그만두지 못한 것은 나의 죄다. 그 문원리수(文苑理藪)에 있어서 조금치도 얻은 것이 없지만, 어쩌면 이 일 자체가 세상에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일을 하면서 또한 감히 고인(古人)에 핍진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의재 또한 이를 사랑하기를 덕으로써 한다고 이를 수도 없다. 그러나 억지로 그의 청을 막기도 어려우니 나의 죄라 여기고, 이름하여 한거첩(閑居帖)이라 한다. 이에 실제의 일을 적는다."

하곡(荷谷)이 어딘지, 의재(宜齋)가 누구를 말하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림을 그린 이가 상당히 그림을 잘 그렸던 사람이라는 것과 의재라는 사람은 조금 나이는 어린 사람인 듯 하지만 그림의 주인공을 아주 잘 알고 매우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이 그림은 책으로 엮은 첩 중에서 가장 앞부분의 한 장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의재는 꽤 큰 공(空)첩을 주인공에게 갖다 주고 그림을 그려 달라 부탁했고 주인공은 그 첩에 그림을 그려주고 첫 장에 이 그림을 그리고 이런 제기를 써서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적어 놓은 것인데, 뒷부분은 다 없어지고 다만 이 한 장의 글과 그림만 남아서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인생이나 그림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와 같이 돌고 돌면서 흘러가는 것인가?

또 내용으로 보아 이 주인공은 전문 화가라기보다는 사대부 화가라 여겨지며 글씨의 수준이나 유려한 문장으로 보아 보통 사람은 아니라 여겨진다. 글씨는 원교(圓嶠: 李匡師)와 표암(豹菴: 姜世晃)의 중간쯤의 모(方筆)가 난듯 하면서도 부드러움(圓筆)을 띠고 있어서 보기 드문 수준이며, 그림 또한 특별한 준(?)이 없이 가벼이 묵선(墨線)으로 큰 능선과 작은 능선을 끗고 옅은 먹으로 살짝 농담(濃淡)을 주어서 점 몇 개 찍어 나타내고, 세 그루 나무는 적당히 앞뒤로 포치를 하고 앞의 두 그루의 잎은 농담을 주어 싱싱함을 나타내며 그 사이 한 도인이 사색에 잠긴 모습은 하나같이 낯설지 않고 나름의 품격이 느껴진다. 특히 3센티 크기의 서있는 인물상의 얼굴 표정이란, 점 세 개로 어떻게 그리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붓의 힘이 아닐까?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각박한 요즘 세상에 마음의 여유와 활달한 생각이 인다. 아마도 이래서 미술품을 애장하는 것이 아닐까?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