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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광장

‘불친절’에 관한 소고

이경선(한국입법정책학회 이사)

두어 달 전에 페이스 북(Face book)에서 접한 짧은 글 한 자락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자주 뵙진 못하지만 한 결 같이 친근한 어느 누님이 올린 글이다. - 나의 친절함을 만만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겐 더 이상 웃어 줄 필요가 없다(루소) -.

누님은 '어떤 문제에 대해 선과 악에 대한 객관적 판단의 문제인데도 개인의 싫고 좋음의 주관적 차원으로 문제의 의미를 축소 · 희석시키거나 방관하려드는' 어떤 이를 접하곤 그 소회를 간략히 적어 올리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내겐 루소가 남긴 그 멘트가 청춘기부터 불혹을 넘은 지금까지 마음 한쪽에 붙잡고 있던 고민 하나를 살짝 해소시켜 주는 듯한 공감을 받았다. 루소가 진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런 글을 남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상 깊게 읽혀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왜 친절히 대해 주는데 상대방은 저리 불친절한가. 왜 배려하는 데 저이는 상처를 주는가. 저 이의 불친절은 타자에 대한 오해나 낯설음(두려움)인가, 천성이거나 무지인가, 가문의 내력인가 관성화 된 결과인가, 아니면 무시의 발로인가, 혹은 피치 못할 사연 때문인가. 차도남 · 차도녀와 같이 까칠한 멋을 좋다하는 트랜디(유행을 쫒는 이들)이기 때문일까.

어쨌든, 반복되는 불친절의 근원을 다소 디테일하게 응시해왔던 것 같다. 어떤 때는 참고, 못 본 척하고, 무관심했지만, 어떤 때는 점잖거나 유머러스하게 맞받아쳐주거나 때때로 거칠게 '리액션'을 해주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렇더라도 뒷맛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크게 분류해 보면 상점에서 내가 비용을 지불하는 고객인 데도 과하게 성의가 없거나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부조리하거나 나태하거나 권위적인 공무원들을 만났을 때 나의 이의제기는 주로 발동했었던 것 같다. 형법 수업 때 들은 '탈리오법칙, 동해쌍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리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명분화 시키기도 했고, 나의 성정과 부덕함을 탓할 때도 더러 있었다. 나의 보잘것없는 사회적 지위과 자격지심 때문일 수도 있겠다. 부처의 눈엔 부처만 보인다는데, 돼지이기 때문에 돼지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어쩐지 부당하다 여겨지는 일들이 별스럽게 많이 보이고 그것들을 직접 접하게라도 될라치면 나는 답답함과 더불어 개선하고 싶은 강박을 느낀다. 그래서 한 때는 현장에서의 즉자적 해결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검사'가 되고파했던 적도 있었다. '조금 손해 보는 듯 사는 게 인생의 지혜'라는 조언도 되새겨보고 다량의 인문학 고전서와 처세서, 에세이집 등을 읽어보며 답을 구하려 노력도 했었다. 수많은 스승들로부터 각양각색의 정답들을 만났는데 그러면서도 의문의 그늘은 가시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구도이거나 반복되어온 갈등의 인간사와 관련한 해묵은 논쟁 꺼리인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고백건대 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해탈하는 부처가 될 자신이 없다. 최대한 관대하고 온유할 수는 있겠지만 전부를 용서하거나 수용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인격(심신수양)의 문제이거나 지식의 문제(학력이나 배움의 깊이)이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 순전히 '선택'의 문제로 (당분간은) 치부하기로 했다. 상처, 불편, 부조리, 불친절에 대해서 굳이 아무렇지 않은 첫, 인자하고 쿨한 척, 강한 척, 헤아려주는 척 하는 '착한사람 콤플렉스'를 꾸미려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분노조절장애 따위도 뭣도 아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점점 사회 곳곳에서 접하게 되는 불친절한 것들에 대해 침묵하는 버릇이 생기고 있다. 곳곳에 산개해 있는 불친절들과의 조우는 대체로 무거운 침묵과 체념적 응시로 매듭지어지곤 한다. 아픈 자, 상처 받은 자는 아프다 말할 권리가 있다고 배웠지만, 그러나 불친절을 불편하다 표현할 권리 따위는 아무래도 적잖은 이들에겐 무관심한 듯하다.

며칠 전 어느 일본어 선생님으로부터 일본사람들은 대다수가 무척 친절한데 어찌 보면 매우 이중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겉으로는 매우 친절하지만,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 일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중적인 것처럼 읽혀질지라도 우리 사회도 어느 상점에 가고 누구를 만나더라도 친절히 대해주고 상냥하게 안내해주고, 어깨를 툭툭 치고 가는 일도 없고, 깜박이를 켜지도 않고 끼어드는 일도 없으며, 침 뱉는 일로 지나는 이들의 심상을 찌푸리게 만들지 않는, 자신의 직분에 맞게 최선을 다해주는 그런 범국민적 차원의 '친절열풍'이 불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 국민이 친절에 익숙해져 있는 환경은 상상만 해도 흥미롭고 행복한 일이다. 설령 그것이 위선이거나 가식이고 자기방어이거나 연극일지라도 말이다. 중용 23장의 글귀처럼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면 습생이 되고 감동이 되고 세상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핀란드 같은 북유럽으로 이민가고 싶다는 이들의 마음이 헤아려질 때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너무 각박하고 거칠고 섬세하지 못하다. 여유와 여백미가 없다.

인문학적 삶을 지향하겠다고 수시로 되새기면서도, 어느 사이 다소 냉소적으로 굳어가는 모습을 본다. 이런 문제의식들을 학술적 차원으로 그리고 제도개선 등 실무적 차원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소일하며 살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일지 모르겠다.

부조리와의 고전분투, 불친절과의 각 세우기, 제도개선 강박 등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어느 즈음엔가 지금까지 얻어온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과 벗할 때까지 말이다. 따뜻하고 친절했던 수많은 멘토들과 은인들께 감사해 하면서도, 세상 타박을 담은 어리석음을 이렇게 한 자락 적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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