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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48) 석재그림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우연히 경매장에 나온 7폭짜리 석재화첩을 보고 옛날 석재 전시회에서 본 국화그림 화제를 보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던 일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5)는 근대 인물 중에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다. 나라가 망하면 큰 재목이 그 인물값을 하질 못해,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으면 대부분 노름에 빠지거나 음주에 빠져 일생을 허비한다. 하지만 개중에는 한의(韓醫)나 서화로 세월을 보낸 분들도 있다. 석재선생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화에다 마음을 두어 대구의 근대 전통 서화의 한 획을 그었다.

석재의 재주는 당대에 이름이 나서 대원군이 직접 불러 어전에서 즉석 휘호를 시켜 그의 실력을 검증하고 석재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하고, 중국에 가서는 손문(孫文)을 만나 지었다는 시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젊어서부터 팔능거사(八能居士)라는 이름이 따라다닐 정도였으니 이는 시(詩), 문(文), 글씨(書), 그림(畵), 거문고(琴), 바둑(棋), 장기(博), 의술(醫)로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는 의미다.

석재는 대구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안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워낙 머리가 좋아 주위의 기대가 컸다. 어릴 때 이삼만의 제자 서석지에게 글씨를 배운 후에 대원군과 추사 글씨의 곧고 강한 필법을 본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구사하였다. 또 그림은 특별한 스승 없이 글씨와 같이 선이 굵고 호방한 운필로 사군자와 소나무, 연꽃 등을 주로 그렸다.

석재는 1901년을 전후해 중국 상해(上海)에 건너가서 그 곳에 망명 중인 민영익(閔泳翊;1860~1914)을 만나 친교를 맺고, 민영익과 국외의 벗으로 지내던 상해화단의 총수 오창석(吳昌碩)과 포화(蒲華)를 만나면서 그들의 영향으로 그림이 더욱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졌다.

석재 그림의 특색은 시원한 필치의 화제(畵題)가 그림과 잘 어우러지는데 있다. 글씨도 좋은데다가 화제의 내용까지 좋으니 그림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 석재를 우리 문인화의 마지막 거장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필자가 석재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그림 속 화제 읽는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옛날 보았던 국화(菊花) 그림의 화제는 이렇다. 1900년대 초에 중국 상해에 갔을 때 영국총독이 주최하는 어느 시회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국화 그림을 그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썼다.

초인찬후명전원, 진사채래향불휴. 설백성홍다별종, 야지황색최거두.
(楚人餐後名傳遠, 晉士採來香不休. 雪白猩紅多別種, 也知黃色最居頭)

굴원이 먹은 후로 그 이름이 멀리 전해졌고,
도연명이 꺾은 뒤로 그 향기 끊어지질 않았네.
눈처럼 흰 것, 원숭이 같이 붉은 것, 여러 종류 있지만,
그 중에서 황색 꽃을 가장 좋다하네.


백인종인 서양인에게 무시당하던 동양인의 기개를 한 순간에 드러낸 화제다. 이런 화제가 문인화의 묘미다. 여기 소개하는 화첩(사진) 속의 대나무 화제는 이러하다.

"내 대나무 그림은 본래 법식이 없다. 다만 내 가슴속의 생각을 그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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