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목요일언

인권 보호와 공감

김성수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지난해 용인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다. 학교폭력예방교육이라고는 하지만 마침 그 고등학교에서 인권주간으로 치러지는 행사의 일환이라고 하여 인권과 학교폭력을 엮어 함께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둘을 묶어줄 수 있는 연결고리를 생각하다 보니 공감(Empathy)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공감은 단순한 동정(Sympathy)과 다르다. 공감은 감정이입이다. 그 사람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학교폭력의 가해자는 "그 아이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 줄 몰랐어요"라고 곧잘 말한다. 아마 그런 공감의 결핍이 아니고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엽기적인 가해행위를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결핍은 가해자뿐만 아니라 방관하는 주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피해의 원인이 본인의 잘못과 연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원인은 그저 무언가 다르다는 데서 비롯된다. 생긴 게 이상하거나, 하는 짓이 이상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상한 생각과 말을 하거나…. 가해자들은 늘 피해자가 이상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혼자서 살지 않는다. 하버마스가 말했다던가. "한 사람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Ein Mensch ist kein Mensch)"라고. 그렇게 함께 살아야 하면서도 인간들은 그 가운데 서로 다름을 찾는다. 그리고 다름을 소수로 몰아넣는 다수가 되면서 권력을, 우월감을 느낀다. 인권 보호의 역사는 이러한 소수의 다름에 대한 편견, 공격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사실 모든 사람은 다 각자 나름대로 이상하다. 어쩌면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만 공통적이다. 누군가 나와 다를 때 "넌 왜 남들과 다르게 생겼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느냐"고 묻는 것은 옳은 질문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그런 거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나도 다른 사람과 다른 거 많으니까. 그렇게 다름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다름을 이유로 겪어야 하는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다. 학교폭력의 극복도, 인권 보호도 그런 고통에 공감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