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시니어 노트

사실관계를 장악하라

김재헌 변호사

김앤장 등에서 국제소송 및 M&A 업무를 20여 년 간 수행해 온 김재헌(50·사법연수원 23기) 변호사가 어려운 시기에 법조인으로 첫 발을 내딛는 후배들을 위한 멘토링을 자처하고 나섰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김 변호사는 국내 가스회사와 중국 CNPC와의 국제중재건 자문을 시작으로 다국적회사 Mark IV Industries의 싱가포르 소송자문과 Ferrai, Maserati 총판권 인수 자문에 이르기까지 변호사로 외길을 걸어온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국제거래 전문가이다. '변호사 2만명 시대'에 과연 어떻게 해야 개업변호사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응대해야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뭘 배워야 '명 변호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김 변호사가 그동안 현장에서 부닥치며 축적해온 업무스킬과 노하우를 우려낸 '시니어 노트'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변호사들은 주어진 사실에 대하여 법률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것이 자신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변호사업무를 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변호사들은 고객과 만나서 미팅을 하면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관련 자료를 제공받는다. 그리고 고객의 목표와 이유가 무엇인지 듣는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정리한 후에 여기에 법을 적용해서 고객의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을 구상해 본다. 이것이 일반적인 변호사 업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고객이 제공한 자료와 알려준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논리체계와 가치관에 기초하여 판단을 하고 사실을 묘사하는데, 언어의 한계 때문에 그 설명이 정확한 진실을 반영하기가 매우 어렵고, 더군다나 대화의 상대방에게 그 의미가 100% 정확하게 잘 전달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기업 관련 사건의 경우에는 사실관계를 경험한 사람과 그 사실관계를 변호사에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 전달과정의 오류가 더 커지게 된다.

사실관계는 법률 적용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기초인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으면 법률 적용도 엉터리가 될 가능성이 많다. 고객이 많은 비용을 변호사에게 지급을 하고 자문 또는 소송을 의뢰하는데, 변호사가 엉터리이거나 부정확한 사실을 기초로 변론을 하고 협상을 진행한다면 그것만큼 비효율적인 것이 있을까 싶다. 그래도 변호사들은 사실관계를 해결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대체적으로는 고객에서 사실관계의 재확인을 요청하는 선에서 노력해 보고, 이 선에서 사실확인을 마무리하게 된다. 즉, 고객이 알려준 사실대로 진행했으니, 나의 책임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외 출장을 여러 차례 다녔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법률가의 역할은 실제로는 마치 탐정처럼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번은 파푸아 뉴기니의 수도인 포트 모레스비 인근 해역에서 한국 선박이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선박의 침몰이 고의적 침몰인지 아닌지가 한국 법원에서 쟁점이 됐다. 보험회사인 고객은 나에게 고의 침몰임을 뒷받침하는 각종 자료를 제공하였으나, 내가 보기에는 고의성을 판단하기에 충분한 자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객으로서는 내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자료를 다 제공해 준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줄 자료가 없는 상태였다. 이런 불충분한 자료를 가지고서 우리가 옳다고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더 정확한 증거를 확보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증거를 더 수집해 보자고 고객을 설득한 후, 비행기를 타고 호주를 경유하여 포트 모레스비로 직접 갔다. 포트 모레스비는 치안이 별로 좋지 않는 곳이었지만, 진실을 발견한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현장을 돌아다녔다. 마치 탐정이나 수사관처럼 현장을 관찰하고, 주변을 탐문하고, 사고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 정보들을 하나하나 다시 수집했다. 이렇게 해서 수집된 정보와 자료들을 정리해 보니, 한국에서 고객이 알려준 사실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사실관계가 그려지게 되었다. 나는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변호사에게 제공된 사실관계, 그리고 변호사가 이해하고 있는 사실관계가 엉터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정리하면, 변호사는 법을 적용하는 전문가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법 적용에 앞서 정확한 사실관계 파악을 임무로 삼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사실관계를 장악하게 되면, 그 후 법의 적용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사실관계가 흔들리면, 주장도 흔들리고 법 적용도 어렵게 된다. 젊은 변호사들이 이 점을 유념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의 제안 : 사실관계 파악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라. 이것이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김재헌 변호사 주요약력

▲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객원연구원 ▲ 현대자동차미국법인과 DBS Bank 간 1억 달러 차관거래에 관한 자문 ▲ 금호피앤비화학의 중국합작사 지분인수거래 자문 ▲ 두산중공업-DBS Bank 거래 자문 ▲ 해외 헤지펀드의 한국 증권업 영업 관련 자문 ▲ 키코(KIKO)소송 수행 ▲ 드림허브의 용산 국제 업무지구 개발 관련 소송 수행 ▲ 현 법무법인 천고 대표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