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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45) 운양의 詩 한수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 1835-1920)은 구한말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알지 못하는 역사의 사각지대가 운양이 살았던 이 구한말에서 일제 초기이다. 또 인물도 많이 태어났다. 혼란할수록 많은 인물이 나타나서 이 시대를 구원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후대 역사가의 평가는 냉정하다. 이런 의미에서 운양의 평가는 아직도 미지수다. 이런 저런 평가는 뒤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학자이자 문장가로서의 운양을, 그의 친구들과 지은 친필 자작시 한 수를 보고 느낌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운양은 두 사람의 스승을 모셨다. 한 분은 봉서 유신환(鳳棲 兪莘煥: 1801-1859), 또 한 분은 환재 박규수(桓齋 朴珪壽: 1820-1900)다. 두 분 다 유명하지만 환재는 알아도, 봉서는 대부분 잘 모르지만 경학(經學) 연구로는 환재보다도 더 알려진 분이다. 또 봉서는 낮은 벼슬만 잠깐 했지만 인왕산 밑 사직동에서 서당을 열어 많은 인재를 길렀다. 당시에 기라성 같은 인물은 거의 여기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양을 비롯하여 소산 이응진(素山 李應辰: 1817-1887), 경당 서응순(絅堂 徐應淳: 1824-1880), 진암 박홍수(縝庵 朴洪壽), 미산 한장석(眉山 韓章錫: 1832-1894), 표정 민태호(杓庭 閔台鎬: 1834-1884), 파강 윤병정(巴江 尹秉鼎: 1822-1889), 문우 윤치담(文藕 尹致聃: 1821-?), 하산 남정철(霞山 南廷喆: 1840-1916) 등등… 이들 봉서의 제자들은 운양을 비롯해서 거의가 개화에 아주 적극적이지도 않고,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의 제자처럼 위정척사도 않으면서 적당히 국제정세에 호응해야 한다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후대 학자들은 이들을 온건 개화파라 부른다. 운양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 시는 봉서의 고제(高弟)인 경당 서응순이 충청도 벽지인 영춘(永春) 고을의 현감으로 나간 을해년(1875년) 7월에 인왕산 칠성암(七星菴)에서 하삭음(河朔飮: 여름에 피서를 하며 술을 한 잔하는 모임)을 하면서 지난해엔 같이 있었던 경당이 없어 서운함을 토로하며 지은 시다(사진).

"을해년 칠월 칠석 2일 전에 소산, 진암, 옥거(玉居 尹秉觀), 동포(東苞), 운양이 인왕산의 칠성암에 모여 하삭음을 하는데 모두 경당의 친우들이다. 술을 반쯤 마셨을 때, 모두 경당을 생각하고 지난 가을 경당과 함께 이곳에서 모여 술을 마실 때를 회고하였다. 지금 경당은 영춘 현감이 되어 그 산속에서 백성을 다스리느라 종일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니, 우리들의 이 한가함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다섯되의 쌀에 얽매인 바다. 드디어 여기 북쪽 친구들이 그대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을 한탄하여, 각각 시 한 수씩을 지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그린다.

"그대 생각하나 계곡 구름 아득하여 보이질 않고 / 새로 뜨는 달이 멀리 걸려있어 맑은 빛이 나겠네. / 관복입고 계곡에 걸쳐있는 소나무 어여삐 여기고 / 산가지 세며 옛날 국화주로 술잔 돌리던 생각난다. / 반생(半生)에 겨우 조그만 고을 얻어 다스리나 / 한 계곡 서늘한 맑은 물을 누가 감히 다툴 건가. / 죽림(竹林) 속에 한 사람 없음 탄식하여 / 채색 종이에 묵향(墨香)을 부쳐 드리네"

이때는 운양이 한창 공부하다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막 나가기 직전 무렵이라 어떻게 보면 운양이 벼슬하다가 귀양 간 시기 말고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일지도 모른다. 이런 아름다운 우정이 요즘 같은 세상에도 종종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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