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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말

'마그마'가 발한 극한의 빛과 雲海의 황홀한 만남 - 지리산 천왕봉 일출

문성호 판사(서울남부지법)

2014년 10월 10일 오전 8시. 산청군 시천면 원지리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는다. 여느 때보다도 몸과 마음이 가볍다. 24년 만의 한글날 휴일이 준 여유 때문일까. 연가를 사용하여 평일에도 딴짓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일까. 아니, 오래된 첫사랑과도 같은 존재, 지리산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아침이다.

 일출 순간 벅찬감정에 넋 잃은 감탄사만…
 법계사서 본 저녁세상 고요·평화의 '별천지'
너른 바위에 드러누워 생애 첫 별똥별 감격
 하산길 거림계곡에선 깊은 계류·원시림 만끽

지리산과의 첫 만남은 10년 전이었다. 나이 서른에 법관생활을 시작한 곳은 문화·예술과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 진주(晋州). 실외에서 몸을 움직이는 생활, 즉 아웃도어 라이프를 삶의 원칙으로 삼아온 내게 안성맞춤의 임지(任地)다. 지방에 사는 독신 남성에게 주말은 위기이자 기회. 주저없이 남도의 산, 바다, 명승지를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지리산도 그저 정복대상 중 하나였다. 사전 준비도 없이(물론 등산화 이외에 별다른 도구도 없다)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8시간 만에 가파른 중산리 코스로 천왕봉을 왕복하는 산행은 차라리 구보에 가까웠다. 돌이켜보면 산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한 철없는 청년이었지만, 어머니의 품을 가진 지리산은 이 천둥벌거숭이를 부드럽게 안아 무사히 속세로 돌려보내주셨으니 그저 천지신명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일출 직후 지리산 천왕봉에서 바라 본 동쪽 하늘의 전경. 꿈틀대던 주홍색의 '마그마 덩어리'가 마침내 극한의 빛을 발하며 솟아 올라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조금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가 보다. 배낭 안은 기본적인 등산용품은 물론, 야간 산행에 필요한 LED 조명, 헤드랜턴, 식기세트, 행동식, 코펠, 겨울용 패딩점퍼, 장갑 등으로 가득하고, 배낭의 묵직함에 나는 작은 위안을 얻는다. 반대로 이번 산행에 대한 두려움도 부정할 수 없다. 아킬레스건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입고 봉합재건수술을 받은 지 1년 남짓. 다행히 재활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연초부터 산행을 재개하였지만 약 18㎞에 달하는 장거리 산행에 발목이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배낭에서 소설을 꺼내 읽으면서 마음을 진정시켜 본다.

경상남도 자연학습원에서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었다. 첫날은 법계사까지 약 3㎞ 일정. 시간의 여유는 시야를 넓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 여러 번 다닌 길인데도 주변 풍경이 새롭게 느껴진다. 마음 내키는 대로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하니 어느새 법계사의 범종소리가 들려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적멸보궁 법계사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평화롭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풍경소리는 정취를 더해준다. 법계사에서 저녁 공양을 제공받아 허기진 배를 채우는 행운을 누린다. 다음 날의 강행군을 걱정해서였을까. 많이 먹지도 못하는 사람이 음식 욕심을 부리고 말았다. 지리산 품안에서도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한다.

어둑어둑할 무렵 시야가 트인 너른 바위로 자리를 옮겨 본다. 어스름이 지자 가을 밤하늘은 잠시 별들 차지가 되고, 하늘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무수히 많은 별들을 헤아리기 위해 일행은 바위에 드러눕는다. 생전 처음 목격한 별똥별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쪽 하늘에서는 붉은 달이 떠오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틀 전 개기월식의 여파라고 한다. 블러드 문(Blood Moon)이라고 부르며 불길한 징조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자연의 위대함 앞에 지나친 의미부여는 실례일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고 난 뒤 발 아래 세상을 뒤덮은 '망망대해'의 운해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필자인 문성호(사법연수원 33기) 판사.

천왕봉 일출을 목표로 다음 날 새벽 4시에 길을 나선다. 거친 숨소리는 적막과 어우러지고, 달빛과 인공조명의 도움으로 어둠을 헤치며 천왕봉에 다가간다.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6시 무렵.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여명부터 일출까지의 짧은 시간은 어둠과 밝음, 그 어느 것도 영원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마그마처럼 꿈틀거리던 주황색 덩어리가 극한의 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곳의 언어는 잠시 감탄사와 형용사로 제한된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의지해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읊조리고 그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 정신을 차리고 반대편을 바라보니 서쪽 하늘은 운해(雲海)의 향연이다.

하산길은 장터목대피소 - 세석산장 - 거림계곡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장터목대피소까지 계속 운해를 바라보면서 능선길을 즐길 수 있었으니 이처럼 사치스러운 산행이 또 있을까 싶다. 거림계곡은 등산객이 많지 않은 코스이지만(등산로 입구까지 대중교통편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깊은 계류와 울창한 원시림을 경험할 수 있다. 어린아이처럼 계곡에서 멱을 감으며 음이온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면서 산행을 마무리하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장터목대피소에서 만난 삼부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갈 길이 머니 부지런히 먹으라고 채근하는 아버지와 씩씩한 두 아들. 막내는 한 열 살 정도 되었을까? 등산은 무사히 마치셨을까? 우리집에서 아빠 기다리는 두 녀석을 데리고 지리산 종주하는 날이 과연 올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새로운 인생 목표가 하나 생겼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문성호 판사(서울남부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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