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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41) 황산의 괴석도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조선후기에 오면 전문 화가보다는 문인(사대부)들이 여기(餘技)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서 작가를 알 수 없는 작품이 많이 보인다. 과거를 보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은 그 행적을 알 수 있지만, 산림(山林)에 숨어 학문에만 몰두하게 되면 작가를 쉽게 알기 어렵다. 요즘 말로 하면 문인화(文人畵)인데 문인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 좋은 작품도 있지만 거개가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학문이 높거나 인품이 있는 분의 그림 중에는 작품 수준이 뛰어난 것은 아닌데도 묘하게 운치가 있는 작품이 종종 보인다. 또 이런 분일수록 이런 저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꼭 한 가지 항목의 그림에만 마음을 썼다는 특징이 있다. 풍고 김조순(楓皐 金祖淳: 1765-1832)은 대나무 그림만 그렸고,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유독 난초가 뛰어나고,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1859)은 예운림(倪雲林) 풍의 산수만 그렸다. 여기 괴석도(怪石圖·사진)의 작가 황산 김유근(: 1785-1840) 같은 경우는 괴석을 주로 그렸다.



추사가 활동할 시기에는 실물의 괴석을 수집하는 풍조가 만연하였음은 여러 문헌의 시문(詩文)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림을 그린 전문 화가나 문인화가도 거의 없을 때라 황산의 괴석도는 특이한 존재라고 할 만하다. 괴석의 대가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 1832-1914)가 나타날 때는 조금 뒤인 고종때였다.

이재, 황산, 추사 여기에다 운석 조인영(雲石 趙寅永: 1782-1850)은 나이도 비슷하였지만 젊을 때부터 아주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당색도 노론(老論)에다가 학풍도 비슷했고 가문이나 나중에 벼슬살이 한 것조차도 큰 차이가 없었다. 또 특별한 스승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집안의 가학을 바탕으로 스스로 공부하여 독자적인 개성을 가진 학문세계를 이룬 것이나, 호고벽(好古癖)이 심한 예술적 감성도 비슷하였다. 특히 모두들 중국문화에 깊이 빠져있었고 금석문을 좋아하여 수집벽도 대단하였다.

순조의 장인이자 당대의 학자였으며 정치가로서 외척 세도의 실세였던 풍고 김조순의 큰 아들로, 순조와 헌종 때에 막강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황산 김유근은 1836~1837년께 중풍으로 인한 실어증으로 3~4년 고생하다가 세상을 뜬다.

여기에 소개하는 황산의 괴석도는 실어증이 있기 전인 1836년 초쯤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먹의 농담(濃淡)만으로, 그것도 초묵(焦墨)의 갈필로 그린 이 그림은 실상 전문가도 이해하기 쉬운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묘한 느낌이 든다. 1836년2월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연경에 갔던 친구 권돈인은 이 그림을 가져가 그해 4월 학자이자 화가인 우가 곽의소(羽可 郭儀宵)의 화제(畵題)를 받고, 아울러 곽의소의 죽석도(竹石圖)와 당대 학자인 제람 주성지(霽嵐 周誠之), 지당 애창(至堂 艾暢)의 발문을 받아다 화첩을 꾸민다. 이를 다시 황산에게 가져다주어 소일거리로 삼게 한 것이 바로 이 그림이 있는 첩이다.

이 화첩을 보면 한창 일할 시기에 세상을 떠난 황산, 그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한 것이 너무 아쉽고, 그 친구들 간의 우정에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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