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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38) 문목공 시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오불부군군불여(吾不負君君不余)
양잠신서일성허(良箴信誓一成虛)
귀시중천군즉락(歸時重泉君則樂)
위군하불소주저(爲君何不少躊躇)

나는 그대 저버리지 않았는데 그대 나를 떠났으니/
좋은 말 굳은 맹세 모두 부질없구려/
저 세상에서 어버이 모시고 즐겁겠지만/
나를 위해 조금 더 있질 그랬소.

필자가 좋아하는 조선 중기 학자 오원이 부인이 죽었을 때 지은 애도시이다. 이 시를 지은 오원이 자작시 수십 편을 손수 쓴 것을 손자가 정리해 놓은 시첩이다.



월곡 오원(月谷 吳瑗: 1700-1740, 시호 文穆)의 친필시고 3책과 취몽헌 오태주(醉夢軒 吳泰周: 1668-1716, 시호가 文孝)의 유묵 1책 합하여 4책으로 손자인 약암 오연상(約庵 吳淵常: 1765-1821)이 편집 장정 하였다. 다양하고 미려한 시전지(詩箋紙)에 주로 약간 흘림체로 쓴 시첩(사진)이다.

오태주의 자는 도장(道長), 호는 취몽헌, 본관은 해주이다. 1679년 12세로 헌종의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오위도총부도총관, 조지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예서를 잘 써서 왕실의 옥책(玉冊), 유지(幽誌) 등을 많이 썼다.

오원의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 본관은 해주, 할아버지는 양곡 오두인(陽谷 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태주이다. 오원은 서인에 속하며 대대로 관직에 나갔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노론 계열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얽혀있다. 대학자였던 농암 김창협은 그의 외조부였고, 도암 이재는 그의 고모부였다. 또한 부인은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제자인 수암 권상하의 후손이니 친가, 외가와 처가 역시 노론의 핵심 가문이었다. 오원의 동문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었으니 미호 김원행, 늑천 송명흠, 뇌원 남유용이 이들이다. 24세에 172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을 날렸다. 1729년 정언, 1732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교리, 이조좌랑, 응교, 1739년에는 부제학, 승지,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홍문관 예문관의 대제학직무대리에까지 올랐으나 1740년 41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쳤다. 오원은 공주의 아들이자 그렇게 좋은 가문이었으나 거만하지 않고 늘 겸손하였으며 조부 양곡 오두인이 목숨일 걸고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였던 것처럼 대쪽 같고 곧은 마음으로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직언하여 당시 사람들의 신망을 두루 받았던 선비였다.

순암 오재순(醇庵 吳載純: 1727-1792)의 아들인 오연상의 자는 사묵(士默), 호는 약암이다. 1800년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1811년에는 영변부사로 홍경래의 난을 이겨내고, 그 뒤 한성부의 좌윤, 우윤을 거쳐 이조참판, 도승지, 비변사제조 등을 역임한 대학자였다.

이 시첩의 글씨가 뛰어나거나 시가 좋다 하는 것을 떠나 한 집안의 삼, 사대가 어울려서 정성을 들여 하나의 이야기 거리를 만든 것에 큰 애정이 간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이 평상시에 느낌을 적어 놓은 것인데 손자가 없어질까 저어하여 묶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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