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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37) 남창잡고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남창(南窓)은 문장가이자 글씨로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와 이름을 나란히 했던 김현성(金玄成; 1542-1621)의 호다. 그러니 남창잡고(南窓雜藁·사진)란 남창 김현성이 지은 잡다한 글 모음이란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문(文)은 한 편도 없고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의 절구(絶句)와 율시(律詩)만 백여 편이 수록된 적은 분량의 시집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문 3장, 시 43장 합하여 46장이다.

그렇지만 이 시집이 특별한 이유는 남창이 친히 쓴 당신 친필시고(親筆詩稿)를 제자인 천파 오숙(天坡 ; 1592-1634)이 친필 그대로 목판에 새겨 발간하였기에 이만큼 남창 글씨의 진면목을 보기 쉽지 않다는 것이요. 또 남창은 어우 유몽인(於于 柳夢寅; 1559-1623)이나 천파 오숙 같은 제자가 있었지만, 아들이 없어 후사가 끊어지는 바람에 집안의 몰락으로 문집(文集)이 집안에 전해오는 것이 있었지만 발간된 적이 없고, 돌아간 후에 묘비(墓碑)의 글은 지봉 이수광(芝峯 ; 1563-1628)이 지었으나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있던 묘소조차 일제강점기시대에 잃어버려 지금은 남창에 관한 남아있는 자료나 유물이 거의 없기에 이 책의 가치는 더 없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서문 글씨를 비롯하여 비문(碑文)이나 편지, 송별시(送別詩) 등등이 종종 남아 전해오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 시집의 글씨는 후세에 남기려고 정성들여 썼다기 보다는 평상시 비망록을 쓰듯 무심히 쓴 흘림체(行草)의 글씨라 당대 송설체(松雪體)의 최고 대가다운, 볼수록 은근한 맛이 배어있다. 당시에도 안평대군(安平大君) 글씨로 간혹 둔갑시키는 남창의 글씨는 안평 같은 종적(세로로)으로 미려하게 뻗은 글씨에 비해 왕희지같이 둥글둥글한 글씨를 썼다. 같은 송설체를 써도 시대나 환경,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다. 만약 국수의 면발로 비유하면 안평은 냉면 같은 면발이라면 남창은 칼국수의 면발이라 할까?

선조임금 당대에 한석봉은 사자관(寫字官), 즉 전문가의 신분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남창은 유필(儒筆)로써 그에 버금가던 명필이었다. 또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그들과 대등하게 시문을 주고받았던 제술관(製述官)으로 참여했던, 글과 시로써 당대에 이름이 났던 분이지만, 글씨에 가려 문장으로는 덜 알려진 분이다. 그런 남창의 시와 글씨를 볼 수 있는 양수겸장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서문은 당대 4문장 중의 한 사람인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7-1638)의 글인데 남창의 인품과 문장이 글씨에 가려있음을 안타가워 하고 있고, 아울러 이 서문을 통해 1634년(인조12) 황해도관찰사로 있던 천파 오숙이 월급을 덜어 관아인 해주감영에서 이 책을 발간했음을 알 수 있다. 오숙은 이 책을 발간하기 2년 전에 경상도관찰사로 있었다. 이 때 그 유명한 두시언해(杜詩諺解) 중간본을 경상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발간함으로써 우리 역사에 큰 공헌을 한 분이다.

이 두시언해 25권의 거질을 발간했던 경험이 있는 분이니 이 얄팍한 시집 한 권을 발간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렸을 적 스승에 대한 정성과 스승의 유언을 이렇듯 알뜰하게 챙기기는 당시가 아무리 어른을 존경하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볼 때마다 내용은 차치하고 옛날 선비들의 의리(義理)와 정(情)이란 대관절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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