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목요일언

변론주의

강태훈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실제로 재판을 하다보면 간단한 주장이나 어렵지 않은 입증을 제대로 하지 못해 패소 위험에 처하는 당사자를 가끔 만나게 된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런 당사자에게 주장정리나 입증을 촉구해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변론주의 - 민사소송에서는 당사자가 주장하거나 제출한 소송자료(사실과 증거)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 - 를 벗어날 수는 없다.

초임판사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원고가 여고 동창의 남편인 피고에게 수차례 빌려준 돈 1억여 원을 갚으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원고는 친구를 통하여 피고에게 돈을 빌려주었지만, 그 친구는 돈을 가져갈 때마다 피고의 사업자금으로 쓴다며 피고 도장이 날인된 피고 명의의 차용증을 교부하였고, 실제로 몇 번은 피고와 함께 온 적도 있었는데 피고는 처가 사망하자 몰라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피고는 처가 원고로부터 돈을 빌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원고가 제시하는 차용증을 작성한 사실도 없으며, 금전 차용과 관련해서 단 한 번도 원고를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원고의 또 다른 친구인 원고측 증인은 원고가 돈을 빌려줄 때 피고가 동석한 것을 보았다고 원고 주장에 부합하는 진술을 하였지만, 차용증의 필적을 감정한 결과는 피고의 자필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동사무소에 조회한 결과 차용증에 날인된 도장도 피고의 인감도장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원고의 주장사실에 대한 입증부족으로 원고 청구를 기각하는 것으로 합의를 마친 후, 판결초고를 작성하면서 기록 전체를 꼼꼼히 검토해 보니 피고가 자녀들과 함께 처를 상속하였고 원고가 빌려 준 돈이 실제로 피고의 옷가게 운영에 적잖이 도움이 된 사정이 엿보였다. 원고가 피고와 자녀들이 처를 상속한 것으로 주장을 변경한다면 청구금액 중 일부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당사자 사이에 실질적 형평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고에게 그런 점을 알려줄 요량으로 판결 이유의 마무리 부분, 즉 "원고의 주장은 이유 없다" 바로 앞에다 "피고가 망인을 상속하였음을 원인으로 주장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라는 문구를 써 넣었다. 하지만 부장님은 위 문구가 변론주의에 위배됨을 이유로 삭제를 하셨다. 초고 작성 당시 사건에 몰입하여 민사소송의 기본원칙을 잊었던 것이다.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