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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법정(Ⅸ)-법관의 '정무적' 판단

강신섭 변호사(법무법인 세종 대표)

연전에 언론 보도에서 행정부 고위직을 맡고 계시던 법조 선배 한 분이 서초동 법원 종합청사의 후배 법관들이 모인 자리에 초청되어 법관에게도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분이 말씀하셨다는 '정무적 판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법률과 양심으로 재판하여야 하는 법관들에게 '정무적 판단'을 요구하는 그 선배 법조인의 진의도 알 길이 없다.

참 세월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만약 권위주의 정권시절에 행정부 고위 관료가 법관들에게'정무적 판단'을 요청하였다면, 행정부의 사법권 침해 발언이라고 큰 논란이 일었을 듯하다. 그런데 당시 그 선배는 조야에서 존경받는 분이었고, 후배 법관들에 대한 진심어린 충언이었기에 법관들에게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여졌던 듯하다.

'황제노역' 판결로 세상이 시끄럽다. 급기야 당시 재판장이 법원을 떠나는 불행한 사태에까지 이르렀고, 대법원은 '지역법관제'의 폐지를 검토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지역법관제를 폐지하면 앞으로는 지방에서 '황제노역'과 같은 판결은 없어지거나 줄어드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동안 수도권에서는 '황제노역'과 같은 판결은 없었을까? 수도권 지역의 법관들은 지역법관들보다 도덕적으로 청렴하고 법리적으로 우수한 분들일까?

며칠 전 어느 언론인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제게 법률밖에 모르고 세상의 정보에 어둡다고 일갈을 하였다. 사회의 빠른 변화에 대한 적응과 준비가 소홀하다는 것이다. 일순간 죽비로 등줄기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 업무에 관한 시간을 메마른 논리의 일관성에 집중할 뿐, 그 근저에 깔린 인간들의 삶의 애환과 고뇌, 인간들이 이루는 사회와 변화, 내 업무가 사회에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고민하여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필자가 재임하던 시절 형사판결 주문에서 환형유치는 거의 장식품에 불과하였던 것 같다. 당시에 벌금을 납부하지 못하여 환형유치를 당하는 분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었고, 실제 환형유치를 당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런데 요즘은 각종 경제법에서 벌금액수가 커지면서 환형유치의 액수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지방의 부호도 벌금을 납부하지 않고 노역으로 벌금을 때우겠다고 하지 않는가. 수도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사회의 유지조차도 평판과 명예보다는 돈을 택하고 있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황제노역' 판결의 법관들도 지역부호인 피고인이 벌금을 내지 않고 감히 노역을 택하리라고 예측하지는 못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세상은 변해 있었다. 어느새 자유형 못지않게 재산형의 사회 통제력이 커진 사회가 되었다. 필자를 포함한 일부 법조인들이 그러한 사회의 변화에 둔감하여 있었을 뿐이다. 지역법관제의 폐지가 답이 아니라고 본다. 법관의 인간과 사회,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답이라고 본다.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L'habit ne fait pas le moine). 화려한 법복이 위대한 법관을 만들어 주지는 못할 것 같고, 제도의 변경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여 주지도 못할 것 같다. 소위 '정무적 판단'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초한 판단이라면 그러한 판단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