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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36) 노천 방윤명 화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학문과 예술에 뛰어나기도 했지만, 당시의 잘못된 풍습이나 관습에도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했던 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그러했다.

당시에 양반은 양반이 아닌 다른 계급, 특히 중인(中人)들과 어울리는 것을 매우 창피하게 여겼으나, 추사는 그걸 알면서도 아전, 역관이나 화가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대했고 그들이 혹 찾아오면 마다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아마도 왕실의 사위집이란 것도 있고 집안이 당대에 이름을 떨쳤기 때문인 것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다른 양반들은 그리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일이였다.



여기 소개하는 노천 방윤명(老泉 方允明: 1827-1880)은 자는 노천, 호 역시 노천이며 또는 운남(芸南)이라고도 한다. 본관은 온양(溫陽), 우산 방우도(友山 方禹度)의 아들이다. 노천도 대대로 중인계급 사람이었지만 역관인 역매 오경석(亦梅 吳慶錫: 1831-1879)이나, 소당 김석준(小棠 金奭準: 1831-1915)과 같이 추사문하에 출입했던 사람이었다. 글씨는 추사체를 익혀 추사와 흡사하여 특히 예서(隸書)는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다. 나중에는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 중에서도 매화와 난초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대원군이 집권했던 고종(高宗) 초기에는 대원군의 난초 그림을 거의 대필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여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의 '근역서화징'에 이렇게 나와 있다. "석파노인(石坡老人: 대원군)이 국정을 맡고 있을 때 난초를 그려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노천으로 하여금 대신 그려주게 했다. 노천이 그 필세를 꼭 닮아서 세상에서 능히 분별할 수 없었으니, 요즈음 석파의 난초라고 유행되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이 그린 것이 많다"고. 그래서 그런지 노천의 전해지는 작품이 별로 없다.

이 화첩(사진)은 겉표지에 추사체로 노천재(老泉齋)란 약간 큰 글씨로 제목을 쓰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잡보(), 그 옆으로 소호진장(紹壺珍藏)이라 쓰여 있다. 이로 보아 소호(紹壺)란 사람이 노천의 여러 그림을 모아 첩으로 꾸민 것임을 알 수 있다. 잡보()란 여러 그림을 모아놓았다는 말인데, 여기에는 매화그림 4폭, 난초그림 4폭, 그 외 2폭을 합하여 10폭이 수장되어 있다. 23*14cm의 아주 작은 그림이지만 노천의 그림과 글씨의 품격을 충분히 보여주며, 아울러 추사의 그림과 글씨에 방불하였다는 전해오는 이야기나 기록이 헛소리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어 그 의미가 크다.

그림에는 이름이나 호, 기타 작자를 알 수 있는 낙관이 아무것도 없고, 다만 4번째 매화그림에 화제를 쓰고 밑에 '지하생춘(指下生春)'이란 백문방인이 하나 찍혀 있을 뿐이지만 노천을 아는 데 큰 하자는 아닐 것이다. 이 화첩은 추사 제자 그림 하나를 새로 발굴한 의미가 있고, 조선 말기에 추사의 영향이 지대하였음을 또 한 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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