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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34) 봉래각 현판 탁본 글씨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강원도는 조선시대에 강릉과 원주를 두고 지은 것인데 구한말에는 춘천이 크게 부각되기도 했다. 하여 강원감영(江原監營)은 거의 원주에 두었고 구한말에 잠깐 춘천으로 옮겼다. 그 당시 원주가 물산이 풍부하다거나, 큰 인물이 난 것도 아니면서 강원도의 중심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에 무슨 일로 원주 시내에 있는 강원감영 터에 간 적이 있었다. 현재 강원도청(江原道廳)이 들어선 곳이다. 필자가 원주 시내에서 60여리 떨어진 귀래(貴來)라고 하는 미륵산 자락의 마을에 살 때였다. 감영터라 할 만한 것은 동헌 정문인 선화당(宣化堂)만 덩그라니 남아있던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그 후로 그 곳에 거의 간적이 없고, 고향에 내려 갈 때에도 원주 시내보다는 그 인근 지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선화당 건물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10여 년 전에 한학자이시자 필자의 스승이신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1920-2006)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조금 낡은 큰 탁본을 하나 주시면서, 우리 집안(延安李氏 月沙公派)에서는 이 글씨가 추사글씨라고 전해 오는데 참고자료로 쓰라고 하셨다. 이 글씨는 선생님 말씀과 같이 추사가 봉래각(蓬萊閣)이란 누각에 쓴 현판글씨의 탁본(사진)으로 추사 글씨의 진본은 아니지만 추사글씨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였다.

이 봉래각 탁본을 받자마자 필자 머릿속에 화석화된 강원감영터의 선화당이 다시 되살아났다. 이 현판은 현재 어떤 곳에라도 남아 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다행히 탁본글씨라도 볼 수 있어 매우 다행스럽다. 더군다나 이 글씨는 크기가 3미터쯤이나 되고 쓴 사람이 다름 아닌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선생이라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옛 강원감영의 선화당 뒤에는 연지(蓮池)라 이름 붙은 큰 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이 언제 없어 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일제 초기가 아닐까 한다. 조선 후기 어떤 사람이 강원도 여행 중에 쓴 기록을 보면 이 연못이 매우 컸었던 것 같고, 그 안에는 배도 다니고 조그만 섬도 두 개나 인위적으로 만들었는데 조금 큰 섬 위에 지은 누각(樓閣)이 바로 봉래각이라 한다. (蓬萊閣: 在宣化堂北蓮池中小島上-東遊拾囊란 책중에서) 조금 작은 섬에는 채약오(採藥塢)을 만들고, 그 외에 반은 연못에 반은 언덕에 기둥을 걸쳐서 지은 조오정(釣鰲亭)도 있었다고 한다. 매우 운치 있는 풍광을 가진 멋진 연못이었던 것 같다.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아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놓고, 당사자들이 일에 지칠 때에 피로를 풀기 위함보다는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을 위로할 용도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모든 이름이 신선과 관련이 있는 은일지사(隱逸之士)의 삶이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관아 뒤에 멋지게 연못을 만든 이유는 강원도에 오는 선비의 대부분이 금강산을 목표로 하고 여행을 오기 때문일 것이다. 한 켠으로는 멋지지만 손님을 맞는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이 봉래각 글씨는 다른 추사의 명품과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다른 글씨인 도덕신선(道德神仙)에 못지않게 봉(蓬)자의 책받침()이 멋들어진 추사 노년 글씨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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