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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33) 김광수의 자찬묘지명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에 오면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는 청나라의 영향이 지대하였고 또 약간의 생활여건이 그 전 보다는 나아졌기 때문이다. 지금 말로하면 약간의 세계화가 되었다고 할까? 아니면 아주 보수적인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성향에 식상한 지식인이 등장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그림,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문장,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글씨 등이 이런 추이의 한 축을 이루면서 문화의 다양성을 발전시켰다.



상고당 김광수(尙古堂 金光遂: 1696.12.18-1770.8.13)는 바로 이 시기에 골동수집으로 이름을 날렸다. 영조 때에 활동한 대표적 문벌 좋은 집안의 지식인으로 벼슬보다는 골동품에 취미를 가져 일생을 서화(書畵)와 고동(古董)에 푹 젖어 자기만의 멋을 가지고 살았던 인물이다. 아마도 조선 최초의 골동수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 그 때의 수집가는 대부분 서화수집을 주로 하였지 기물(器物)이나 도자기(陶磁器), 벼루나 먹 등을 수집한 이는 거의 없을 때였다.

이런 김광수 옆에는 둘도 없는 친구가 한 사람 있어 사람들은 이 둘의 사귐을 신교(神交)라 불렀다. 바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칭송을 듣던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였다. 원교는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에게서 글씨를 배워 백하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더 모가 나면서 꺾고 비틀 때의 활달한 획의 변화가 있는 글씨를 써서 원교체(圓嶠體)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아마도 상고당 집에서 본 한비(漢碑)나 석고(石鼓) 등의 많은 글씨 탁본첩(拓本帖)의 영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고당이 수집한 그 귀한 고비(古碑)를 최대한 수용해서 그런 글씨가 나왔다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또 이때는 지식인들 사이에 산사람이 죽어서 자기 무덤 속에 넣는 묘지명(墓誌銘: 생광명)을 직접 쓰는, 일명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어느 날 상고당은 스스로 지은 자신의 묘지명을 원교에게 부탁하여 쓰게 한다. 한데 이 글씨를 가지고 언제 누가 돌에 새기고 탁본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여기에 소개하는 탁본첩을 보면 제목은 '유명조선상고자김광수생광(有名朝鮮尙古子金光遂生壙·사진)'이며 구(句)마다 압운(押韻)한 28구(句) 196자의 칠언시(七言詩)로 되어있다.

서(序)나 지(誌)도 없이 바로 시로만 쓴 묘지명도 희한한 일이지만 12자의 약간 큰 제목글씨의 전서(篆書)와, 196자에 '상고자자명(尙古子自銘)' 6자를 합한 202글자는 행서의 맛이 깃든 해정한 해서(楷書) 글씨로 원교가 매우 정성을 다해 썼음을 알 수 있어 원교의 전서와 해서의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 아울러 이 두 사람의 신교와 같은 사귐이 글자 행간에 서려있는 듯하여, 이 탁본첩의 명과 글씨를 볼 때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추구한 이상향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우정이 너무나 진솔하고 고상함에 머리를 수그릴 뿐이다.

둘이 언제부터 친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상고당이 원교를 위해 선대부터 전해오는 행주의 별장에 원교가 찾아오면 언제든지 머물 수 있는 방 한 칸을 마련해 놓고 방 이름을 내도재(來道齋: 원교의 字가 道甫라서 도보가 항상 오라는 뜻)라 붙였는데, 내도재기(來道齋記)는 원교가 지었다. 이 글과 여러 상황을 더듬어 보면 원교 나이 30세 전후로 여겨진다. 원교가 1755년 억울한 일로 함경도 부녕(富寧)과 전라도 신지도(新智島) 유배생활 중에는 물론, 이후 죽을 때까지 두 사람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 우정과 세교(世交)는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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