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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법정(Ⅲ)-준비서책

강신섭 변호사(법무법인 세종 대표)

제가 경험한 법정 일화를 재미있게 구성해 보겠습니다. 재판장께서 개정을 하자마자 "원고 대리인이 며칠 전 준비서책(?)을 제출하셨네요?" 하고 운을 뗍니다. 이어서 "100면이 넘는 서면이라 준비서면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준비서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줄여서 간명하게 작성할 수는 없나요. 재판부가 상당한 시간을 들였음에도 아직 준비서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재판부가 충분히 검토하고 이해할 때까지 준비서면의 진술을 보류하겠습니다"하고 말합니다. 원고 대리인의 등줄에서는 식은땀이 흐릅니다.

소송 대리인의 입장에서도 항상 준비서면을 간명하고 효율적으로 작성하려고 무진 애씁니다. 그러나 복잡·다단해지는 거래의 구조와 내용을 간명하게 그려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금융거래에 신탁이 혼합되어 있는 경우가 흔히 있고, 신탁제도를 활용한 부동산 거래가 있으며, 인수합병(M&A) 거래에서도 선진금융기법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Swap Deal 등 각종 파생금융상품 거래에도 ISDA Agreement가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거래의 관련 계약서는 흔히 100면이 넘습니다. 그러한 거래에서 분쟁이 생기면, 송무 변호사들이 거래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됩니다. 그러한 거래를 제3자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간명하게 설명하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평범한 재주로 준비서면을 작성하다 보면 의외로 길어지게 되고 장황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없는 한, 보통의 변호사가 갖은 노력을 하여도 요즘 준비서면의 양을 간명하게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다, 어떤 사건의 1심 판결이 400면을 넘고 항소심 판결이 300면이 넘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러한 판결을 작성하는 법관들의 노고를 짐작합니다. 그리고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한 판결을 작성하는 법관에게 '더 간명하게 작성해 당사자를 효율적으로 설득하고 상급법원의 원심판결 검토 노력을 줄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거래가 복잡하고 당사자의 주장이 다양한 사안에서는 판결문도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사이 100여면을 넘어가는 판결문을 자주 보게 됩니다. 대법원 판결도 예외가 아닙니다. 판례공보에서 대법원 판결 하나를 검토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검토하고 나서도 판결의 취지를 잘 이해하였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수년전 존경하는 선배 한 분이 "이제 판례공보를 받고 그 판례들을 일독하는 노력을 포기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진즉에 그러한 노력을 포기하고 있던 저로서는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인공위성이 우주를 탐사하는 시대에, 인수분해와 미적분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우니 덧셈과 뺄셈 등 산수만 하고 살자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거래 규모가 커지고 국적이 다른 이해 당사자가 많아질수록 관련 계약은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며 내용도 어려워집니다. 이러한 시대에 준비서면과 판결문이 길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살아 남으려면, 그렇게 길어지는 준비서면과 판결문에 익숙해지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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