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서초포럼

재판의 달인

백강진 판사(서울고등법원)

초임 법관 시절, 특강 등에서 대법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햇병아리 입장에서 '재판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대법관의 말씀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지혜였다. 특히 판결서 작성 방식에 관하여 상세하게 지적하신 말씀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공간(公刊)된 자료 등에서 절대로 배울 수 없는 비법을 전수받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초임 법관은 법원 내부에서 여러 선배 법관의 지도를 받아 재판에 관한 비전(秘傳)의 절기(絶技)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현재에는 과거 생각지 못하였던 전문 분야 사건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관계 당사자와 소송 대리인들이 동종 분쟁만을 계속 다루어 본 결과 상당한 전문성을 보유하게 된 반면, 판단자인 법관은 사실관계는 물론 해당 분야의 전문적 배경 지식에 관하여 가장 정보가 부족하게 될 위험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과거와 같은 도제식 교육을 통한 암묵지(tacit knowledge)의 전승이나 판결서의 형식적 완결성을 위한 일반적 숙련도의 연마만으로는 더 이상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종래 법원 재판의 권위는 막스 베버가 관료제의 권위 형성 방식에 대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내부 정보의 엄격한 비밀유지에 따른 내·외부 정보량의 불균형에 힘입은 측면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하급심 판결 데이터베이스를 비롯하여 재판 관련 정보의 전면 공개가 예상되고, 양형 재량권의 범위도 점차 축소되고 있는 등 정보의 우위에 따른 이점은 점차 사라질 전망이다.

대안은 외부의 새로운 정보에 대한 법관의 접근 통로를 넓히는 것이다. 먼저 이를 위해서 법관이 스스로 전문가(expert)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광범위한 경험을 가진 사람(generalist)에 의한 재판이라는 전통적 가치는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몇몇 외국 사례에 비추어 보면 특정 분야의 전문가에 의한 재판은 단점이 더 많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법관은 해당 분야의 올바른 전문 지식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식견(specialty)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전문가의 재판 관여를 강화할 수 있는 각종 증거조사절차 등 재판제도와 아울러 법관 인사제도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최근 미국의 사례 연구(Ball&Kesan, 24 HVJLT 393, 2011)에 의하면, 재판의 속도와 정확성은 법관 개인의 전문성이 아니라 해당 분야 업무 비중과 경험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즉 말콤 글래드웰이 주장한 '1만 시간의 법칙'이 재판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로스쿨과 법조일원화, 평생법관제의 본격적 시행으로 각 전문 분야에 관하여 풍부한 경험을 쌓은 '재판의 달인' 양성을 위한 기초 여건은 충분히 갖추어졌다고 보인다. 이러한 인적 자원의 양성을 위한 관련 제도의 정비야말로 우리 법원이 고민하고 있는 하급심 강화와 재판 신뢰회복의 첩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