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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언

아버지와 딸

전주혜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판사님, 아버지가 제 결혼식에 꼭 참석하실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결혼식 마치고 아버지를 꼭 돌려 보내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형사재판을 하다보면, 유·무죄나 형량을 두고 고민하는 경우도 많지만, 재판진행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로 고민할 때도 있다.

얼마 전 재판부에 구속집행정지 신청이 들어왔다. 1심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은 사건이었는데, 피고인의 큰 딸이 8월 말에 결혼하기 때문에 결혼식 무렵 며칠간만 석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기록을 보니 쉽게 구속집행정지를 해 줄 사안은 아니었다. 사기 금액만 4억 원에다가 변호사법위반죄도 있었고, 4억 원 중 3억 원은 전혀 피해변제가 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피고인은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구속을 피해 2009년 3월 외국으로 도피해서 3년 8개월 정도 외국에 체류한 도망자였다. 게다가 이 사건은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인 사기사건이었고, 피해자들이 입게 된 고통으로 볼 때 피고인에게 인간적인 동정을 할 여지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재판부를 고민에 빠지게 한 것은 피고인의 큰 딸이 제출한 여러 통의 편지였다. 피고인의 부인은 정신장애 3급이었는데, 피고인의 큰 딸은 외국으로 도망간 아버지를 대신해서 정신장애자인 어머니를 돌보면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한 상태였고, 그 동안 사귄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결심하면서 외국에 도망 중인 아버지를 설득해 귀국하게 한 것이다. 그 동안 악착같이 열심히 살아 온 흔적이 편지 구석구석에 묻어 있었다.

피고인이 혹시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속집행정지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피고인의 큰 딸에게 큰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인간적인 고민도 많이 들었다. '피고인이 그 때 도망가지 않고 제대로 조사받고 재판을 받았더라면' 하는 생각에 피고인이 야속하기도 했다.

결국 피고인 큰 딸까지 참석한 가운데 심문기일을 열었고, '꼭 돌아오겠다'는 피고인의 다짐과 '꼭 돌려보내겠다'는 피고인 딸의 결연한 태도를 보고 나니 피고인이 도망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지난 8월 29일, 피고인은 큰 딸의 결혼식을 잘 마치고 재수감되어 판결선고를 받았다. 항소기각 판결을 선고받고도 공손하게 인사하는 피고인을 보니, 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피고인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며칠 간의 고민은 어느덧 사라지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