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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태프트 대법원장의 개혁

신봉철 변호사(법무법인 이산)

일생의 야망이 최고행정관(대통령)이 아니라 최고사법관(대법원장)이었던 윌리엄 태프트는 꿈의 순서대로 1909년 대통령이 먼저 됐다.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5인의 대법관과 1인의 대법원장을 지명하는 이례적 기회도 가졌다. 태프트는 1910년 대법관들 중 조용하지만 인기 있다고 보고된 에드워드 화이트를 대법원장에 지명하면서 65세를 넘긴 고령의 화이트가 오래지 않아 은퇴할까 걱정이라고 말했지만 속으로 그 점에 끌렸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지명장에 사인하면서 "내가 가고 싶은 자리에 딴 사람을 지명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고 클래어 쿠쉬만은 썼다. 그는 대통령 퇴임 8년 후인 1921년 대법원장이 되어 약 9년 동안 재임하고 72세에 은퇴해서 한 달 후 사망했다. 그는 취임 4년 만인 1925년 대법원이 심리할 사건을 선택하는 데 거의 완전한 재량권을 의회로부터 얻어내 사건의 홍수 속에 떠내려가는 대법원을 구했다. 그래서 탁월한 의견으로 존경받는 대법관들이 속속 나오고, 수 없이 인용되는 의견들이 뿜어져 나오는 토대를 마련해 나라 사법의 격이 높아지고 따라서 국민 각자의 격이 높아져서 결국 나라의 격이 높아졌다. 오코너 전 대법관은 현대 대법원이 1925년 탄생했다고 최근 썼다.

지금 미국 대법원은 1년에 심리청원 된 약 8000여 건 가운데 1% 조금 넘는 90건 정도만 심리허가한다. 심리허가권을 가진 영국 대법원도 2011년 4월부터 다음해 3월말까지 85건의 판결을 했을 뿐이다.

태프트는 대법원장에 취임하고 첫 회기가 시작되자마자 대법관 3인을 상고심개혁법 초안을 만드는 위원회에 임명했다. 오코너에 의하면, 태프트는 개혁법안이 부드럽게 통과되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개혁에 우호적인 상원의원들이 법사위원회에 배치되도록 추천하기까지 했고, 동료 대법관들이 개혁법안을 지지하도록 독려했으며, 그들이 의회에서 진술하도록 주선하기도 했고, 미국 법조협회의 지원을 공격적으로 구했으며, 심지어 몇몇 상원의원들과 타협하려고 했다. 그의 뜻 요지는 재판청구권은 사실심 1회, 사후심 1회면 모두 행사된 것이고, 대법원이 강제로 심리해야만 하는 것은 '헌법구조의 문제'에 국한되며, 그 이외에 대법원은 재량껏 일반 이해가 걸린 법문제를 가진 사건을 선택해 심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코너의 말에 비추어 보면, 지금 한국 대법원은 현대 미국 대법원이 아니라 1925년 이전 대법원이다. 조리사가 극소수인데, 밀려오는 손님들을 다 받아 일일이 서비스해야 하는 식당과 노크하는 손님들 중 극소수만 골라 서비스하는 식당의 서비스 수준 차는 엄청날 것이다. 사람 차별한다는 말이 금방 나올 수 있지만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이해가 걸린 것인지 아닌지 사건을 구별하는 것이고 그렇게 이해된다면 차별이라는 인식은 곧 오해가 된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 3월 13일 신문방송편집인협회에서 "지금 상태대로 대법원을 이끌고 가는 것은 무리다. 단점이 없는 제도는 없다. 어떤 제도를 택해야 할지 결단을 내릴 시기가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가 임기 중에 국회를 설득해 결단하게 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