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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21) 추사의 '진흥북수고경'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1848년12월6일 제주 유배가 풀려 1849년1월 서울에 온지 겨우 2년 반이 되지 않은 1851년7월22일 다시 함경도 북청 땅으로 유배를 받았다. 당시 진종(眞宗; 사도세자의 형. 후에 추존하여 진종이고 철종이 진종의 왕통을 이음)의 조천에 관한 예론에서 친구인 권돈인(權敦仁; 1783-1859)과 같이 진종의 위패를 종묘로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가게 된 것이다. 9년여의 제주도 귀양생활에 이골이 난 추사로서 정반대인 북청에 가게 되었으니 마음이 오죽했으랴. 더군다나 당신뿐 만 아니라 형제가 모두 가진 것이 전무한 상태였으니 더더욱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이때의 심정이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동쪽에서 꾸고 서쪽에서 얻어 북청으로 떠날 여비를 겨우 마련했지만 아우(명희와 상희)는 그 가난한 살림에 어디에서 돈이라도 마련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어렵사리 북청에 도착한지 얼마 안 돼 뜻밖의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후배이자 뒤에서 이리저리 많은 편의를 봐준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해온 것이다. 적적하던 추사에게 윤정현의 부임은 다시 한 번 학구열을 불태우게 했다.

추사는 일찍이 권돈인이 함경도관찰사로 있을 때 옛날 황초령(黃草嶺)에 세웠던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보게 하여 마침내 그 비 한 조각을 찾아냈고, 그 탁본을 얻어 금석학연구에 요긴하게 쓴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윤정현은 권돈인 때 찾지 못했던 다른 한 조각을 보충할 수 있었다. 추사가 북청에 갔을 때에는 권돈인 때 찾았던 비석 잔편을 제대로 보존을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추사는 새로 부임해 온 윤 감사께 특별히 부탁하여 원위치에 비편을 세워 보호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윤 감사는 여러 사정으로 원위치인 황초령 고갯마루에는 세우지 못하고, 그 아래인 중령진(中嶺鎭)에 옮겨 세워놓고 비바람에 견디게끔 비각을 세웠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친 후 윤정현 감사는 추사에게 이 비각을 짓게 된 내력과 비각에 현판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때는 1852년8월이었다. 이리하여 추사의 명품 글씨 두 가지가 나오게 된다. 하나는 현판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이건비문' 이다. 이건비문은 관찰사 윤정현의 이름으로 쓰여 있으나 내용과 글씨가 추사 아니면 쓸 수 없는 글과 글씨다. 아마도 죄인의 신분이라 이름을 밝힐 수 없어 그리 한 것 갔다. 현판은 아무 관지가 없다. 이를 두고 아는 사람만이 알아본다는 것일까. 현판 글씨는 추사가 배운 모든 서체를 최대한 아울러 굳세면서도 강약을 잘 배합하여, 한 글자마다 짜임새가 멋있을 뿐만 아니라 한 점의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 전체적 조형이 매우 뛰어나다. 한마디로 북청시대 추사글씨의 백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