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서초포럼

학자의 우정

신평 교수(경북대 로스쿨)

겨울이 깊어간다. 세한도에 불던 그 세찬 바람이 다시 불어오는 듯하다. 유배지 한 칸 모옥(茅屋)에서 맞는 겨울은 뼛속 깊이 스며들었으리라. 나라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올해 큰 변동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11월 초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대륙에서 시진핑 총서기로 권력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12월 들어 아베 신따로가 이끄는 일본의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정권교체가 되었다. 그 며칠 후 한국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 변환의 모습을 한 꺼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마음이 영 편치 않다. 동북아 삼국간의 관계가 제2차대전 종전 후 이렇게 긴장관계에 빠진 때가 일찍이 없었다.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삼국은 국가적 자존심을 전면에 내걸며 무한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특히 극우적 성향인 아베정권의 탄생이 불길하다. 여유를 잃고 초조해하는 일본, 치솟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중심국가 위상을 회복하려는 중국은 다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전면적 대립양상을 초래하였다. 그 사이에 낀 한국,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조선조 말에 이어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책임을 맡은 경북대학교 법학연구원에서는 12월 하순에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외국의 참가자들로부터 격조 높은 대회였다고 칭찬을 받아 기뻤다. 준비를 위해 애를 쓴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강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중국을 대표한 한대원 중국 인민대 법학원장, 일본을 대표한 토나미 와세다대 교수와 나는 학술대회를 마치고 맹세를 했다. 정치가 각자의 조국인 삼국을 갈라놓더라도, 학자로서 우리들은 삼국 간 국민들의 우호와 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나아가자는 맹세였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입헌주의의 실현 같은 이념적 공통기반이 있고, 우리는 이를 절대 배반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이념적 동지이다. 손을 함께 잡고 자못 엄숙한 마음으로 맹세했다.

학술대회를 마치고 해인사로 내려갔다. 그날, 12월 21일 그 지역에 폭설이 내렸다. 세상은 온통 한 폭의 수묵화로 변하였다. 우리가 다다른 다음 이내 교통이 두절되어, 일대는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중국의 학자들은 함박눈을 맞으며 어린아이들처럼 기뻐했다. 사실 자연환경이 아름답기론 한국만한 나라가 없고, 게다가 함박눈에 포근히 쌓인 한국의 산하가 얼마나 뛰어난 경관이겠는가!

호텔에 그들을 데려다 주고 로비에서 일일이 포옹을 했다. 석별의 정은 애틋했다. 여름에 베이징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했음에도 아쉬움은 깊었다. 우리의 우정은 정말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이념적 동지이다. 호텔 로비를 나설 때 실무의 수고를 맡아준 연구원 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제가 보니 어떤 분은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나 역시 내색은 감추었으나 같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