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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수구레 이야기

신평 교수(경북대로스쿨)

우리 기억의 저 먼 창고에 쌓여있는 낡은 사건 하나를 끄집어내 보자. 필자가 10대 초반의 소년이었던 1960년대에 소위 '수구레 파동'이 일어났다. 뜻밖에도 어떤 중국의 학자가 키득거리며 이 사건을 언급했다. 그는 한국의 부대찌개가 원래 피혁제품을 만들기 위해 소가죽에서 화공약품을 써서 떼낸 쇠고기로 만든 것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사정을 제법 잘 아는 그의 처지에서 단지 내 확인을 구하는 듯했다. 그의 말 속에는 한국인들이 지금 제법 잘 산다고 뻐기지만, 너희들도 우리 중국처럼 못 먹고 못 살던 때가 있었지 않았느냐는 강한 어필의 냄새가 났다.

당시 우리는 말 그대로 가난한 나라였다. 그럼에도 군화제작용 소가죽에서 발라낸 고기조각, '수구레'라고 하는 이것을 부대찌개를 비롯한 요리에 넣어 사용한 일은 사회적으로 큰 파동을 빚었다. 나중에 판사로서 피혁공장을 산업재해 현장검증을 위해 방문한 일이 있는데, 가죽에서 살을 발라내기 위한 약품처리장에서 나는 냄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옆에 잠시라도 서있기가 어려운 악취였다. 부글부글 끓는 그 현장은 한 편의 지옥도였다. 이렇게 떼낸 살점들, 유해 화공약품이 덕지덕지 붙었을 그 고기들을 식용으로 썼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이해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비참하기 짝이 없는 처지에서 출발했다. 유명한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 Le、vi-Strauss)가 1970년대 한국에 와서 "문화에는 높낮이가 없다. 모든 문화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결과이다"라고 했을 때 국가적 열등감에 싸여 있던 대학생으로서 나는 감격했다. 차차 경제적 힘을 쌓고 다시 민주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의 발전과정은-여기에서 상술할 수는 없어도-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자랑스런 민족이고, 그 성취는 인류의 금자탑이다. 하지만 그 절망적 상황에서 무릎 꿇고 서글피 울며 좌절했던 과거를 아예 없었던 것으로 치지는 말자. 그러면 우리는 정체성이 텅 빈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문화의 어떤 요소들을 끄집어내, 한국은 세계의 선도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자주 나온다. 우리 말 속에 녹아있는 '어울림의 문화'는 인류의 바람직한 장래를 가리키고 있다는 따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의식에 가득 찬 주장은 1980년대 말 한창 일본이 전성기를 구가하며 힘을 얻던 때 일본사회에서 터져 나오던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에서 어떤 일본 문인이 달을 쳐다보며 오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일본 민족밖에 없다는 취지로 쓴 글을 읽으며 분개한 일이 있다. 왜곡된 우월의 감정은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제노포비아(Xenophobia)로 분출하기까지 한다.

우리의 성취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어도,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과 비교하여 원래 인종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헛된 교만이다. 이제 우리는 이를 부끄러워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