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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이야기

[한자이야기] 화승(火繩)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

화승(火繩)은 불을 붙이는데 쓰는 실끈입니다. 요즈음은 이 실끈이 도화선이라는 말로 사용되는 듯합니다. 화승(火繩)은 실에 불을 붙여 타 들어 가는 시간을 측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선비들이 모여 한시(漢詩) 짓기 놀이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시계라는 것이 없었을 때입니다.

선비들이 모여 일정한 길이의 화승에 불을 붙여 천장에 매달아 놓고 그것이 다 타서 끊어지기 전에 시를 지어야 했습니다. 이는 각촉시(刻燭詩) 놀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촛불의 타는 시간에 맞추어 시를 짓는 것이 각촉시입니다. 한시를 빨리 짓는 주필(走筆)도 이렇게 해서 나온 술어(述語)입니다.

전해오는 얘기입니다. 김삿갓의 금강산 유람입니다. 금강산의 유정사라는 절이라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이 절의 어느 스님이 시짓기를 무척 즐겼습니다. 유람객이 오면 재워주고 잘 대접하면서 반드시 시짓기 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기에 지는 사람은 반드시 이긴 사람에게 이빨을 뽑아 바치는 것이 그 내기의 내용이었습니다.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한 구를 읊으면 제한 시간 안에 이에 맞는 댓구를 지어야 합니다. 이 제한 시간을 화승(火繩)으로 결정했습니다.

대구(對句)는 그 형식 내용이 반드시 먼저 지은 구와 맞아야 합니다. 남의 시에 맞추어 대구(對句)를 읊음이 쉽지 않습니다. 먼저 읊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분이 먼저 읊고 나이가 비슷하면 주인이 먼저 읊습니다. 우선권을 주는 것입니다. 대구에 잘 맞게 시간 안에 지으면 이기고 화승이 다 타도록 못 지으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빨을 뽑히게 됩니다. 천하의 김삿갓이 이 소문을 듣고 그 절로 찾아 들었습니다. 스님과 만나 수인사를 나누고 찾아온 내력을 밝혔습니다. 스님은 무척 환대하며 그를 방안으로 안내했습니다. 무심코 벽과 천장을 보니 이빨을 엮어 매단 것이 여러 줄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스님에게 당하고 간 흔적임을 직감했습니다.

한편으로 섬짓했지만, 그러나 그가 누군가. 천하의 김삿갓 아닌가. 팔도의 훈장들을 골리고 얼마나 많은 썩은 선비들을 주물렀던가. 속으로 전의를 느끼며 스님과 태연히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도 강원도 영월에 있는 삿갓의 무덤 주위에 돌에 새긴 그의 시편들이 우리의 흉금을 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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