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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짓밟히고 짓밟다

신봉철 변호사(법무법인 이산)

1914년부터 1941년까지 약 27년 간 미국 대법관이었던 제임스 맥레이놀즈는 대법관 시절 그가 쓴 의견(during good behavi-
or)보다 그가 한 나쁜 행태(bad behavior)로 더 유명하다. 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 남성인 그는 그보다 약 2년 후에 대법원에 들어온 최초의 유태인 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와 약 23년 간 동료였는데 그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3년 간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 말을 한 이후로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대법관 회의 때 자기 의견을 말한 후 다음 서열인 브랜다이스가 의견을 말할 차례에 그의 의견을 듣지 않으려고 회의실을 나가곤 했다. 회의실을 나가면서, 돌아올 때를 알기 위해 문을 살짝 열어뒀다. 대법관들 공식 단체사진을 찍을 때 맥레이놀즈가 브랜다이스의 바로 옆에 있어야(뒷줄 안쪽 두 자리) 하는 시기에 맥레이놀즈는 브랜다이스 옆에 있기 싫다면서 사진 찍는 것을 거부해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인권의 전당 안에서 벌어진 인격 짓밟기다. 클래어 쿠쉬만은 브랜다이스가 맥레이놀즈의 무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공민성(civility)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27개(27번이 아님)를 개정한 미국 헌법은 225년 전 적힌 원문을 개정권자가 한 자도 빼거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원문 뒤에 개정 사항을 추가했으나 9번 개정했다는 한국 헌법은 개정한다는 사람들이 원문을 전문부터 다시 쓴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헌법이 정한 개정절차에 따르지 않아서 개정이 아닌데도 개정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 위 두 가지 개정 방법 사이에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의견들이 많지만 후자의 방법에서는 아무래도 저자의 정신을 짓밟는 느낌이 든다. 개정을 허용하지 않는 성경에 주석을 다는 것과 성경을 다시 쓰는 것 사이의 차이보다는 덜하지만.

자유인에게 자기 생(生)은 어느 것과도 절대 바꿀 수 없는 최고이고, 타인에게 그의 생도 정확히 그만큼이다. 이와 같이 동전의 양면처럼 양립할 수밖에 없는 '자유'와 '평등'의 실질인 절대 최고를 '인간으로서의 존엄(human dignity)'이라고 부른다. 자유국가에서 최고 존엄은 사람 수만큼 있다. 자기의 존엄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존엄을 알 수밖에 없다. 타인의 존엄을 알면서도 자기만 목적이고 타인을 수단으로 여겨 남의 몸과 마음을 '물건으로서의 가치'로 평가해 사용하거나 버리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 사방에 가득하다. 사람을 보지 않고 그가 가진 것을 보는 세상에서 사람 대접을 받으려면 사람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적어도 높은 자리에 앉아 있든지 돈이 많든지 예뻐야 한다. 각자가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짓밟히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짓밟는다. 강약을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 먼저 짓밟으려고 하거나 짓밟히지 않으려고 경계한다.

한국 헌법 제10조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라는 말이 있다(헌법 제6호부터 기재됨). '존엄'이 담지 못한 다른 의미를 '가치'라는 말이 담지 않았다면 '가치'는 강조를 위한 반복 이외의 의미가 없다. 오히려 가격(price)이라는 의미로 해석될까 두렵다. 이런 말을 하는 나는 한국 헌법 저자의 정신을 아마 짓밟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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