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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이야기

[한자이야기] 무치(無恥)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

무치(無恥)는 부끄러할 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치(恥) 자는 부끄러워하다의 뜻인데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이 합한 글자입니다. 마음에 부끄러움이 생기면 귀부터 빨갛게 된다고 합니다. 무치지치(無恥之恥)는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람의 한 살이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난 연말 이야기입니다. 딸 아이가 침샘 부근에 이상이 있다는 검진 결과가 나왔습니다. 침샘은 이비인후과와 치과 영역의 중간 부위라 어느 분야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야 하는지 애매했습니다. 더구나 안면 부위에 대한 수술이 요청된다는 전문의의 의견이고 보니 가족들은 매우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다 수술 날짜가 매우 촉박하여 다소 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런 애로를 평소 존경하던 N원장께 호소했습니다. N원장은 이미 은퇴하셨지만, 국내 최고 의과대학 병원장을 지내신 분이고 더구나 이비인후과가 전공이신 분입니다. 사정을 들으시더니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이 요구대로 선선히 조치해 주셨습니다. 환자의 처지에서 보면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예비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오가는 중이었습니다. 병원 진료실 바깥 대기실에서 N원장을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왜 이 복잡한 대기실에 계시냐고 물었더니 뜻밖에 진료 순번을 기다린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니 원장님께서 일반 환자와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시다니요! 얼른 간호원에게 말씀드리지요" 했더니 손사래를 치시는 것입니다. 시간도 있고 병도 심각하지 않으니 순서대로 치료받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그만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누구 하면 모두가 아는 의료계의 원로가 이 추운 날씨에 병원 복도에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딸의 치료 때문에 무례한 부탁을 한 자신이 무척 민망했습니다. 역시 교육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의 실천이라야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또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우리 사회에 이런 큰 어른이 계시다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든든하고 훈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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