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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반짝이던 봄날

신평 교수(경북대 로스쿨)

나이 육십이 가까워지니 자꾸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이 바람 불 듯 스쳐지나간다. 괜스레 눈가가 축축하게 젖다가 급기야 눈물이 그렁그렁하기도 한다. 살다보면 슬픈 일, 마음 상하는 일이 많다. 그 기억은 축적되어 있다가 노쇠해지는 육체의 주름살 사이로 삐죽이며 나온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 가슴을 편하게 어루만지고 녹여주는 일도 있다. 맑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일들이다.

봄바람이 세차게 불어 갓 피어난 매화를 사정없이 흔들던 날, 게이오(慶應)대학의 코야마(小山) 교수가 경주로 찾아왔다. 한국과 일본의 헌법학자들이 공동으로 행하는 저술사업인 '한일헌법학자의 대화'에 실을 원고 내용을 최종적으로 조율하기 위해서 일부러 먼 여행길을 마다 않고 온 것이다. 작년 한국에서 1차로 '한일헌법학자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발표한 것을 토대로 내용을 다듬어 헌법의 일반이론에 관한 내용을 담은 첫 번째 책을 내기로 되어 있었다.

경주의 내 집에서 두 사람은 오전에는 원고를 가다듬고, 오후에는 경주관광을 하였다. 사흘을 그렇게 꼬박 보냈다. 바깥에서 보면 무척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거니 할 정도로 둘이는 방에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단순한 원고 정리뿐만 아니라 수 십 년 지기가 만난 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곤소곤거렸다. 크게는 한국과 일본이 처한 사정, 작게는 양국의 헌법학계, 한국의 헌법재판소 판례 동향, 더 작게는 두 사람에 한정된 일까지 화제로 삼았다. 내가 최근에 지은 시를 둘이서 함께 일본어로 번역해보기도 했다. 힘을 합치니 꽤 괜찮은 일본어 시가 되어 기뻤다. 오후에는 경주 남산, 박물관, 선덕여왕릉 등 곳곳을 피곤한 줄 모르고 쏘다녔다.

제2회 한일헌법학자 세미나를 일본에서 올 8월에 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고맙게도 우리 측 참가자에게 1인당 200만 원 가량을 비행기 삯과 체재 경비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온천이 나오는 명승지를 세미나 개최지로 하겠다고도 했다. 함께 연구를 하고, 책을 내고, 또 관광의 넉넉한 여유까지 베풀어지는, 대단히 모범적인 학문 교류의 이정표를 새롭게 세우는 뻐근한 기분이 되었다.

내가 농담 삼아 말했다. "한국인은 지금 전 세계인을 대표하여 인터넷이 인류사회에 미칠 영향을 실험하고 있어요." 그는 일본인에 대해서는 어떤 비유를 할 수 있겠는지 물었다. "아마 일본인은 재앙을 맞아 인류가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지를 용감하게 실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웃음의 그늘에 숨은, 아직 채 극복하지 못한 대재앙(일본에서는 '大震災'라고 부른다 했다.)에 대한 두려움의 기색을 엿볼 수 있는 듯했다.

그는 돌아갔다. 두 사람이 쌓은 깊은 인간적 정리(情理) 그리고 한일간 학문교류의 모델케이스를 확립했다는 자부심은 바람을 타고 먼 산을 향해 날아가는 매화꽃 조각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일생을 두고도 결코 녹슬지 않을 반짝임이다. 하지만 지금도 일본인이 대재앙에서 겪고 있는 참화에 무거운 마음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하루 빨리 수습하여 건강한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