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고미술 이야기

(12) 만해수연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선생하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다. 모든 좋아하는 요소를 다 갖고 있었으며, 일반 사람이면 그의 시를 절대적으로 생각하겠지만, 필자는 그의 인품, 특히 불굴의 정신을 말하고 싶다. 근대 인물 중의 한 명을 꼽으라면 꼽힐 분이다. 이런 분의 글씨 한 점 갖고 싶은 욕심은 나만의 욕심일까?

70년대 후반 통문관에 근무하며 스승으로 모신 분이 만해 선생의 유발제자 해어 김관호(海於 金觀鎬)선생이시다. 한때는 대서업을 하셨지만, 만해 선생 살아계실 때는 만해 선생을 곁에서 모신, 독실한 불교인이자 민족주의자였다. 우연히 해어 선생과 친구 분인 골동가게 동화당(同和堂)을 운영하고 계시던 김동규(金同圭)씨와 얘기 하는 중에 「만해수연첩 萬海壽宴帖」이야기를 듣고 , 부탁하여 이 첩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쓴 회갑연 즉흥시.

1939년7월12일이 만해 선생 회갑날이었다. 박광(朴洸: 1882~?) 선생과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 선생의 주선으로 여기저기 몇몇 분을 연통하여 동대문 밖에 있는 청량사(淸凉寺)란 절에서 조촐한 회갑연을 준비하였다. 심부름은 나이 어린 해어 선생이 맡았다. 점심나절 회갑연을 끝내고 쭉 둘러앉았는데, 뭔가 서운하였다. 벽초 왈 "김군이 얼른 진고개에 가서 서첩 하나 사오게" 하여, 해어 선생이 그 길로 지금의 을지로 근방에서 백면 서첩을 사가지고 돌아갔더니, 상 물린 그대로 앉아서 담소를 하고 계셨다. 이때 이 빈 서첩을 내놓고 제일 연장자인 우당 권동진(憂堂 權東鎭: 1861~1947)선생부터 서첩에 글을 썼다. 다음은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석정 안종원(石丁 安鐘元: 1874~1951), 백강 이병우(白岡 李炳宇: 1888-1941), 지오 이경희(池吾 李慶熙: 1880~1949), 박광, 홍명희, 유방주(兪邦柱), 고이태(高履泰), 이원혁(李源赫: 1890~1968), 현석년(玄石年), 노기용(盧企容: 1897~1975), 장도환(張道煥: 1903~?), 박윤진(朴允進)이 쓰고 김관호 선생 차례가 오자 극구 사양했으나, 벽초의 야단을 듣고 "산고수장(山高水長)" 4자를 쓰자, 바로 주인공인 만해 선생의 그 유명한 회갑연 즉흥시가 그 특이한 글씨로 나오게 된다.













바쁘게 지나간 예순 한 해
사람들은 짧은 생애라고 말하지요.
세월은 비록 흰 머리를 짧게 했지만
風霜도 이 붉은 마음은 어쩌지못해.
가난을 받아들이니 凡骨이 바뀐 듯,
병을 버려두니 妙方을 누가 알리.
流水같은 남은 생을 그대여 묻지 마오,
뭇 나무에 매미소리 지는 해를 따르니.

이렇게 만해수연첩이 탄생하여, 그 후로 해어 선생이 가지고 계셨는데, 6.25사변 때에 잃어 버렸다. 한데 이 첩이 그 뒤에 해어 선생의 친한 친구인 김동규(金同圭) 옹의 골동점에 다시 나타나는 바람에, 해어 선생의 손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해어선생은 이 첩의 앞과 뒤의 빈 공간에 당대 최고의 화가 이당 김은호 화백과 칠보사 주지로 계셨던 석주(昔珠) 큰스님의 그림과 글씨를 채워 놓았다. 이리하여 총 18점이 된다.

그 후에 해어 선생은 이 수연첩을 양도하고 그 값으로 만해 선생이 한 때 계셨던 설악산 오세암에 만해 선생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고자 염원하셨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 일을 도왔던 필자는 이 서첩만 보면 이 여러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