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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이야기

(11) 명시별재집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십오륙 년 전쯤에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1920-2006)선생님을 모시고 댁에 전해오는 장서(藏書)를 구경하다 청장관 이덕무(靑莊館 李德懋;1741-1793)와 그의 아들 이광규(李光葵;1765-1817), 손자 오주 이규경 (五洲 李圭景;1788-1856)의 친필 원고본 십여 종 20여 책을 구경하고 수불석권하였다. 이 책들은 거의 작은 중국책을 연상시키는 손 바닥 만한 책으로 손때가 묻어 책을 잡은 느낌이 옛 친구의 손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다수 이덕무의 책이었고, 이광규는 한 종류, 이규경이 두 종류였다. 모두 책을 출판하기 위해 깨끗이 정서한 판하본(板下本) 용으로 정리한 것으로 느껴졌다. 한참 후에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이문학회(以文學會)에 갔더니 이 책을 꺼내와 저에게 보이시면서 책은 꼭 볼 사람이 가져야 한다면서 굳이 제게 주신다. 이 책은 제가 한참을 가지고 있다가 개인이 가지고 있을 책이 아니라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보관해야 마땅하다고 여겨, 선생님께 상의하여 지금은 어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이덕무의 그 박식한 학문과 그 낭창한 반흘림의 아름다운 글씨가 지금도 눈에 어른거린다. 왜 한 권이라도 남겨 놓고 보내지, 그냥 다 보냈는지 종종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근간에 모 경매회사에 나온 물품을 검색하다 깜짝 놀랐다. 선생님 댁에서 본 그 책 중에 찾지를 못해 나중에 찾으면 주신다고 하시던, 이규경의 시가점등(詩家點燈)과 명시별재집(明詩別裁集) 중 바로 그 명시별재집 4책이 있지 아니한가?

2,3일간 밤잠을 설치고 기다리는데 얼마나 시간이 더디 가는지….결국은 그 책을 샀고, 눈에 선하던 그 글씨를 항상 품고 자게 되었다. 이덕무와 그 책들만 생각하면 돌아가신 선생님이 자꾸 생각난다.

선생님께 들은 이 책들이 전해오게 된 내력이 또한 재미있다. 1860년 겨울, 곡현(曲峴)에 살던 이규경의 아들 때에 살림이 매우 어려워 결국은 3대에 걸친 책이 매물로 나오게 되었다. 이 때 선생님의 고조부의 형제분 중에 안산군수를 지낸 이준수(李俊秀)란 분이 계셨다. 이 분이 개화기에 매우큰역할을하신 환재 박규수(桓齋 朴珪壽;1807-1877)의 장인이었다.

이준수(李俊秀) 어른은 높지 않은 벼슬을 하신 분이지만 인품과 학문은 높은 분이셨는데, 박규수는 이 책이 나왔다는 애기를 듣고 바로 사서 처가에 보내와 선생님 댁의 장서가 되었다 한다.

요즈음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들 부른다. 이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도 생겼지만, 영조의 왕권 강화와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 젊은 학자의 후원이 이런 문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정조 때 문화 부흥에 큰 역할을 담당한 실무자가 요즈음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사람들 중 특히 규장각 4검서의 이덕무, 유득공(柳得恭;1749-1807), 박제가(朴齊家;1750-1805)가 유명하다. 이들은 서얼과 가난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남다른 소명 의식을 부여하여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덕무는 이들 중에 나이가 위이기도 하지만 한겨울 이불이 없어 논어(論語), 한서(漢書)라는 책을 덮고 추위를 견딘 일화는 당시의 책 읽는 지식인의 불우한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슬픈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