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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참여재판 그림자 배심 참가후기

곽영임(방송작가)

-  간단하고 사소해 보이는 재판… 형식·절차는 철저했었다

"사건만을 보지 말고 그 속에 담긴 인생에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12월 6일 오전 10시 30분. 변호사와 방송작가 등 스무 명 남짓한 그림자 배심원들에게 인사말을 전하던 성낙송 형사수석부장판사님의 마지막 당부는 생활리듬을 완전히 거스르는 새벽 여정 탓에 잠시 멍청하게 졸고 있던 저를 화들짝 일깨웠습니다.

"엥? 판사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냉철한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건만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피고인의 인생과 범죄 동기의 이면, 드러나지 않은 속내와 피고인의 감정 등등에 관심을 갖는 건 드라마 쓸 때나 필요한 거 아닌가요? 배심원이 피고인의 인생에 관심을 갖다보면 동정심에 눈이 멀 수도 있지 않을까요? 죄가 밉지 사람이 밉냐. 뭐 이런 감상에 빠져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구요… 그런데 어찌하여 그의 인생까지 헤아려 보라시는 건지…?"

마음 속에서 수다스런 궁금증이 일었지만 직접 보고 듣고 느껴봐야 알 일.

일단 재판에 몰입하기로 했습니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했습니다.

'2011년 10월, 서울 대학로에서 노동일을 하며 고시원 생활을 하던 40대 초반의 피고인이 70대 중반의 노숙자를 심야에 커터 칼로 위협해 3천원을 강취한 특수강도 사건'.

하지만 단순한 사건 개요와 달리 재판 전개는 그리 간단치 않을,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는 그림자 배심 담당 판사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피고인이 범행 자체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피고인 측이 형량을 줄이기 위해 공방을 벌이는 대부분의 재판들과는 달리 피고인의 유·무죄를 밝혀야 하는 재판이라는 점에서 검사와 피고인 측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재판이 시작되는 오전 11시. 함께 참가한 동료 작가와 법정으로 이동하며 장발장이 훔친 은촛대도 3천원은 넘었을 거라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비록 그림자 배심이지만 유·무죄를 가려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과 긴장감이 몰려 왔습니다.

피해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사건 발생 한시간만에 피고인을 검거한 경찰관 두 명에 대한 증인신문에서부터 검사와 변호인 측의 날선 공방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될수록 무섭게 상승하는 공방의 수위와 배심원을 재판에 몰입시키는 정도는 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법관의 고압적이거나 권위적인 자세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판사와 검사, 변호인이 사용하는 어휘는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시민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해 재판을 이해하는 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참여재판제도가 시행되면서 방송가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법정물이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여전히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각색된 허구일 뿐 우리나라 재판에서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저 역시 설령 미드에서 봐 왔던 법정 공방이 가능하다 해도 우리 법정에서 그렇게 치열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국민참여재판을 지켜보고 그림자배심에 참여하면서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방송작가로서 '법정물'이라는 콘텐츠의 공급과 수요가 가능해졌다는 점에 주목한 것은 아닙니다. 재판부를 비롯해 법정에 있는 모든 이들의 고뇌를 지켜보고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판단해 봄으로써 재판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재판의 경우 평결에 큰 영향을 미칠만한 증거인 커터 칼이 발견되지 않았고, 피해자이며 유일한 목격자인 증인이 출석하지 않아 재판 막바지에는 공방의 초점이 3천원어치 동전의 개수와 실제로 강취를 했는가 여부에 집중되다 보니 저와 같은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간단하고 사소해 보이는 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재판'에 대해서도 사법제도의 형식과 절차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사법부를 위해서나 국민을 위해서나 국민참여재판이 '고비용 저효율'의 시비를 뛰어넘어 꼭 정착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됐습니다. 또한 국민참여재판이 적잖은 국민들이 여전히 갖고 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인식이나 우리나라 법원의 양형이 너무 가볍다는 세간의 불만 등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재판은 사건의 피해자이며 목격자인 증인이 불참해 다소 맥 빠진 상태가 됐지만 마지막까지 판단의 기준을 높이기 위한 배심원들의 날카로운 (서면)질문이 이어졌고 오후 6시에 시작된 배심원 평결은 30여분 만에 끝났습니다.

무죄가 선고되고, 촘촘히 세워두었던 신경줄을 풀고 나니 그때부터 눌러두었던 감상이 밀려왔습니다. 피고인의 나이는 저와 같은 1970년생, 40대 초반의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력이라면 내 또래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렇듯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이 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피고인은 왜 이 곳에 설 수 밖에 없었을까…. 법의 엄격함을, 준법이라는 궤도를 아주 조금만 이탈해도 평범한 삶에서 너무나도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피고인은 왜 좀 더 빨리 알지 못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겨 집으로 돌아오면서 법정물을 준비하는 작가가 아니라도, 법관을 꿈꾸는 아이가 아니라도, 자신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다 자신하는 사람이라도, 그 누구에게든 국민참여재판을 지켜볼 기회를 가져보라 권하고 싶어졌습니다. 분명히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이전의 시선과는 다른 시각을 갖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죄송하고 부끄럽다'는 피고인의 최후진술이 진심이길,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다시 느끼는 일이 없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으니 그제서야 아침의 화두가 온전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사건만을 보지 말고 그 속에 담긴 인생에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