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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 테이프

김상순 변호사(서울종합법무법인)

우리 대법원판례는 증거의 증명력 판단과 관련하여, "사람이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실에 대한 기억은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흐려질 수는 있을지언정 오히려 처음보다 명료해진다는 것은 이례에 속하는 것이므로 목격자인 증인의 각 진술이 특별한 이유없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소사실에 부합되도록 번복되고 있다면 그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판시하여 시간이 갈수록 명료해지는 증언의 신빙성을 배척하고 있다.

카세트 테이프(Cassette Tape)는, 1980년대 CD 플레이어가 개발되면서 조금씩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하였지만, MP3 플레이어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많이 사용되었다. 녹음테이프는 발라져 있는 자성체(磁性體)에 따라 종류가 나뉘어지고, 노멀 테이프에서 크롬(Chrome) 테이프, 메탈 테이프로 올라갈수록 가격이 비싸지며 그만큼 품질도 좋아졌다. 어느 연배 이상의 사람들이라면 용돈을 털어 비싼 크롬 테이프를 샀던 추억이 있으리라. 등하교 길에 눈 여겨 본 인근 여고생에게 선물하기 위하여 밤새워 노래들을 녹음하던 추억. 그리고 버스 안에서 쭈뼛쭈뼛 수줍게 건네던 추억. 크롬 테이프는 같은 노래를 반복 녹음하면 좀 더 음악이 선명해진다던가. 선명한 음질을 위하여 두 번 세 번 같은 노래를 밤새 녹음하면서 흐뭇해하던 추억.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 사람만의 크롬 테이프가 있다. 추억(追憶)이라는 이름의 크롬 테이프. 제법 따사로운 봄볕을 쬐며, 머리 내민 새싹들을 보며, 계속 뇌(腦) 속에서 크롬 테이프는 반복 녹음을 시도해댄다. 나만의 크롬 테이프는 어느 디지털 매체보다 오래 그리고 선명히 저장되리라. 그러고 보면 위 대법원판례는 "아련한 추억"이라는 단어를 "특별한 이유"라는 단어로 담백하게 표현해 둔 걸까. 판결요지로 어느 옛 봄날을 추억할 수 있다는 건, 역시, 직업병(職業病)이다.

@bizzazz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