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나의법조회고록

[나의법조회고록] 양병호 변호사 ② 변호사의 보람(下)

양병호 변호사(전 대법관)

6·25 사변이 일어나고 얼마 가 지나 동네에 인민위원회 등의 기구가 생겨났을 때 하루는 어머 님이 우리 집에 쌀이 많이 있다는 허황된 소문이 동네에 돌고 있다 고 걱정하기에 나는"이곳 인민 위원회 위원장이 조유성이라고 하는데 그 조유성이는 6·25사 변전 치안유지법(6·25사변 전 에는 이 법 위반 형사사건이 당시 전체 형사사건의 태반 이상을 점 하고 있었음) 위반 사건으로 서울 형무소에 구속되어 있을 때 내가 그 사람의 변호를 맡아 여러 번에 걸친 면회와 재판 때 성심성의껏 열심히 도와 주었으니 만약 헛 소 문이 인민위원회에 알려지면 그 사람을 찾아가 얘기하면 무고함 을 밝혀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내무서에 잡혀가게 되자 어머님이 내무서에까지 따라와 "우리 아들은 아무죄도 없소. 살 려주시오"하고 애원해도 소용없 이 나를 끌고 내무서 안으로 들어 가버리고 보초는 저리 가라고 고 함을 지른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달려온 처도"아까 내 무서에 붙잡혀 들어간 사람은 제 남편인데 남편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요. 제발 살려주시 오"라고 울부짖어도 그 소리를 들은 내무서원은 보초에게"저 여편네에게 물이나 한 바께쓰 끼 얹어"라고 소리친다.

어머님과 처는 하는 수 없이 눈 물을 머금고 한참 서있다가 그대 로 집으로 돌아와 어찌해야 할지 곰곰 궁리해보다 어머님이"무슨 탈이 있거든 그 인민위원장에게 가보세요"라고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그 힘이나 잡아볼까 하 여 오후 6시경 인민위원회 사무 실을 찾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바 쁜 듯이 웅성거리고 있는 가운데 위원장이라는 뚱뚱한 사람을 찾 아가"내가 양병호의 어머니인데 그 애가 아무 죄없이 저기 내무서 에 끌려갔으니 위원장께서 그 곳 으로 가셔서 우리 아들 살려 다시 우리집에 보내주도록 말씀을 잘 해달라"고 사정을 했으나"양병 호고 뭐고 모르겠소. 바쁜데 여기 까지 와서 이러시니 난들 어찌하 겠소"라고 신경질만 부리기에 그 냥 돌아왔다가 오후 9시경 다시 가보고 오후 12시경 또 다시 가 보았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하는 수 없이 9월 24일 오전 4시 경 네 번째 찾아가"양병호 내 아 들을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다시 또 간청하였더니 위원장 조유성 은 네 번이나 찾아와 같은 말을 하는 중년의 부녀자의 호소에 감 동했는지"양병호가 대체 어떤 사람이오"하더란다.

"양 변호사요. 그 애가 당신 사 건 변호를 해주지 않았소"라고 대답하였더니"아! 양 변호사, 그 사람 이제 알겠다"며"내무서에 가보십시다"고 일어서더라는 것 이다.

이렇게 하여 오전 4시40분경 조유성이가 내무서에 찾아와 불 쑥 내 앞에 나타나 만나게 되었다.

5개월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무슨 구세주를 만난 듯 어쩔 줄 몰라 그를 붙들고"내가 누군지 잘 알지 않소. 나는 아무 잘못 없 이 어제 저녁 이곳으로 끌려 왔는 데 내가 무슨 반동을 하였소. 나 는 변호사만 하였지 반동 따위는 전혀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내무 서에 꼭 상세하게 얘기하여 나를 방면토록 해주시오. 부탁합니다" 고 사정하였더니 그 사람이 진지 한 표정으로"네"라며 턱을 몇 번 까닥거리더니"잘 알겠습니다. 말 해보지요"하고 나간 지 30분 가 량 지난 뒤 첫 번째 신문자가 나 타나 밖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라고해 천신만고끝에 내무서를 나와 9· 28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구출된 경위인데 조유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꼼짝없 이 납북되었을 것이다. 아니 납북 도중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다행히 지금까지 살아있 다하더라도 탄광 등에서 모진 고 생을 한 끝에 수척한 몰골이 되어 허덕이고 있겠지, 나의 이제까지 의 모든 위치와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나의 집 가족이나 나에 대한 역사는 확 바뀌고 말았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는 오직 조유성 덕택으로 살 아남게 된 것이라고 보는데 여하 간 그는 나의 은인임에는 틀림없 다. 조유성은 그 이후 한 번도 만 나지 못했는데 국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였다는 풍문도 들렸다.

9·28이후 서울 법조계에서 납북된 사람은 변호사가 80명 내 지 100명 정도라고 하는데 판· 검사에 비하여 그 수요가 훨씬 많 았다.

어떻게 되었거나 조유성을 위 한 변호를 열심히 성실하게 해 주고 또 사건 전에 그에 대한 안 면도 있었던(나보다 3,4세 더 많 은) 까닭에 내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며 이것이 변호사로 재 직한 까닭에 얻어진 보람이 아 닌가 한다.

그 이후의 전황 이야기를 몇 마 디 쓰고 이 원고를 마감하고자 한 다. 9월25일 낮 인천에서 서울로 진격해 들어오는 미군과 국군들 이 서울에 있는 인민군의 포병부 대와 교전하는 대포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려오는 지라 우리 집 은 아현동 대로변에 접하여 포격 당한 것을 알고 이 곳을 피하여 가벼운 이불 정도만을 가지고 친 척이 사는 충정로 산비탈 집의 방 공호로 전가족이 피신하였다.

9월27일 밤에는 참으로 대단 하였다. 바로 위에서 대포가 꽝꽝 내리 누르듯 했다.

쉬지않고 강타하는 무서운 밤이 었다. 쥐 죽은 듯이 떨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9월28일 아침이 밝아오 자 만세소리가 들렸다. 국군이 들 어온 것이다. 나는 미친듯이 일어 나 거리로 나갔다. 미군이 2열 종 대로 앞 뒤 사람 약 10미터 간격을 두고 중앙청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었다. 길가는 포연이 자욱하고 불탄 집도 있고 아직 마지막 불길 이 있는 곳도 있다. 나는 신문로 우리집을 가보았다. 신문로 일대 는 포연기만 자욱하고 마지막 불 길이 남아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 다. 아 우리집도 함께 타 버린 것 이로구나 앞이 캄캄하였다.

서울중학교 대문(지금 경희궁 흥화문)앞에 가보니 처가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들고 우리 浩進이 를 등에 업고 浩運의 손을 붙들고 서있는 것이었다. 나는 처자를 부 여 안고"너무 서러워하지 마오. 재산이 없어졌어도 우리는 모두 살아남지 않았는가. 저 씩씩한 국 군장병들의 행진을 눈여겨 보라" 고 하며 위로하였다.

2003년 05월 15일 (제3170호)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