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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법조회고록

[나의법조회고록] 선우종원 변호사 ③ 사상검사 체포령과 피난생활

선우종원 변호사

1950년 6월25일 새벽.

38선을 밀고내려온 북괴군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는 아군을 밀어내고 단 숨에 수도 서울을 향해 맹진격을 해왔다.

당시 정부에서는 수도 사수를 다짐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 오를 통해"사랑하는 서울시민 여러분! 나를 믿으십시오"라며 집을 지키라는 방송을 했다.

국회에서도 수도사수 결의안 을 통과시켜 민심수습에 안간힘 을 썼으나 밀려오는 피난민의 입 에서는 한결같이'절대적으로 우 세한 북괴군'이라는 말뿐이었다.

27일, 저녁 나는 내 담당인 성 동경찰서를 둘러보니 이미 텅비 어 있었다. 급히 나는 육군본부로 차를 몰았으나 그곳도 마찬가지 로 책상과 의자만 덩그러니 있었 을 뿐 어디에서도 사람들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나는'후퇴로구나!'라는 직 감과 함께 용산으로 차를 몰았다.

시간은 28일 자정을 지나고 있 었고 난 한강철교를 넘어 영등포 근처에 이르렀다.

그때 천지를 진동케하는 큰 폭음 이 들렸고 하늘에서는 흙비가 쏟아 져 차 지붕을 요란하게 때렸다.

'무슨 불길한 징조인가…'이 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차의 방 향을 돌렸다.

나는 나중에 그 굉장한 폭음과 흙비가 한강 철교 폭파에 의한 것 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됐고 그길 로 피난길에 오르게 됐다.

여기서 잠시 오랫동안 나와 함 께 일해온 정희택 검사의 눈물겨 운 땅굴에서의 피난 이야기를 소 개해 보려 한다.

북괴의 남침 다음날 가족들을 친구집으로 피신시킨 정 검사는 급히 국방부로 발길을 돌렸다. 그 러나 그 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 고 때마침 굉장한 폭음과 함께 한 강철교가 끊어졌다.

다음날 이미 서울은 완전히 북 괴군 손에 떨어졌다.

정 검사는 당시 친구인 상명여 중 교감집에 숨어 있었으나 나날 이 죄어드는 심리적인 압박과 북 괴의 벽보 포고문에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 검사는'상명여중 자치위원'이라는 완장을 팔에 두 르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은신 처를 떠돌다 마침내 정착지를 찾 아냈는데 어려서부터 알고지낸 박제원 목사댁이었다. 박 목사는 3.1운동에 가담해 7년간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였다.

당시 생사의 기로에 서있던 정 검사는 이집의 변소 옆 마루바닥 을 뜯어낸뒤 며칠간에 걸쳐 사람 하나가 간신히 웅크리고 들어갈 만한 땅굴을 파고 이곳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정 검사는 이 차디찬 지하 공간 에서 아침 저녁 죽한그릇으로 끼 니를 이어갔다. 그나마 하루에 두 번씩 갖다주던 죽도 한달이 지나 자 한 그릇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정 검사에게는 이것보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빨갱이들 의 살기가 더 두려웠다. 바깥 곳곳 에 나붙은 현상벽보와 계속해서 좁혀오는 공산당의 압박에 정 검 사는 숨쉴 기력조차 잃어가며 아 군의 수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 목사로부터 아군의 인천상 륙소식을 듣고 정 검사가 악몽같 은 90일간의 지하생활을 끝냈을 때 온몸은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정 검사의 지하생활은 당시 서 울에 남아있던 법조인들의 대표 적인 이야기가 됐다.

한편 여러 가지 사정으로 피난길 에 오르지 못한 법조인들 중 일부 는 검찰청 안에 소위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북괴에 협력했는데 위원장 은 법학자동맹의 조평재였다.

그리고 법조 프락치 사건에 관 련, 수감된 피고인들 대부분에게 무죄판결을 내려 물의를 일으켰 던 이태규 판사 등은 자치위원회 에 가담했다가 이후 월북했다.

6.25 동란 중에는 애석하게 납 북된 법조인도 수십명에 이르렀 다. 이들 대부분이 노년층이거나 공산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던 민사판사들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이상기 대법원 판사, 김태영 부장판사 등 이었다. 이 밖에 해방 직후 고검 검사장을 지낸 구자관씨도 납북 돼 우리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는 28일 새벽바람을 맞으며 아슬아슬하게 한강을 건너 대전 까지 내려갔다. 대전에서 검찰 간 부들과 서울 수복의 날만을 손꼽 아 기다렸다. 그러나 들려오는 정 보들은 참담하기만 했다. 당시 나 와 함께 사상검사로 일하던 이주 영 검사가 공산당에 의해 피살됐 고, 북의 점령지역마다 오제도 검 사와 나에게 2백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우리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와 동료검사들은 개별행동을 하기로 하고 나는 진 해까지 내려가 비참한 피난생활 을 해야했다.

그럭저럭 한달쯤 지난 어느날 라디오에서 이상한 방송이 들려 왔다.

'공지사항'에서 나를 찾고 있 는 방송이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 가?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지만 여전히 다음 공지사항 시간에도 내 이름이 나오는 것을 듣고"놈 들이 현상금 2백만원을 붙였다더 니 서울방송국을 점령하고 잔꾀 를 부리고 있구나"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길에서 내가 법무부 검찰과장으로 있던 시절에 부하로 있던 박용진 사무관을 만났다. 박 사무관은 조병옥 내무장관이 나를 급히 찾는다는 방송을 하고 있다며 부산으로 가 보라고 했다.

난 그 길로 부산으로 발걸음을 옮겨 조 장관을 만났다.

조 장관은 첫 대면에서 나를 보 자마자"아니 당신이 저 사상검 사로 이름난 선우종원씨요? 이거 참 홍안의 미소년 아닌가!"라며 험상궂은 얼굴에 걸맞지 않은 미소를 보였다.

조 장관은 이어"치안국 부국장 을 맡아주시오"라고 거침없이 말 했다. 난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공산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오늘까지 일해 왔는데…. 그런 부서를 마련해 주신다면 기 꺼이 박사님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조 장관은 3일 뒤 나를 다시 불러"선우 검사의 뜻이 그러하니 경찰 기구 일부를 변경해서 사찰 과와 수사지도과를 합쳐 정보 수 사과를 만들었으니 맡아주시오. 전국 1만명의 사복경찰관을 거느 리는 경찰 최대의 기구요"이렇 게 해서 뜻하지 않게 경찰과 인연 을 맺게 됐다.

1950년 8월초의 일이었다.

2003년 04월 17일 (제3163호)
리걸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