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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투자 중국법률] 계약서 언어본: 영어, 중문, 한글

김종길 변호사(법무법인(유) 태평양)

네르친스크(Nerchinsk)라는 러시아의 도시가 있다. 만주어로는 닙추 호톤(Nibcu Hoton)이고, 중국어로는 니부추(尼布楚)라고 부르는 곳이다. 바이칼 호수에서 64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으며, 1만5,748명(2002년)의 인구가 살고 있다. 시베리아서부의 이 소도시는 겉으로는 그다지 중요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역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왜냐하면 1689년8월27일 역사적인 네르친스크조약이 바로 이 곳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첫번째 국경조약이며, 청나라가 맺은 이후의 불평등조약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양국이 평등한 관계하에서 체결했다.

러시아는 16세기 후반 이반대제 때부터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1636년에는 오오츠크해에 이른다. 이때까지는 청나라와 직접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1652년 러시아인들이 흑룡강을 넘으면서부터 무력충돌이 발생한다. 1657년경 러시아는 정규군을 보내어 네르친스크와 알바진(Albazin, 중국에서는 야크사-雅克薩-라고 함)의 두 도시를 건설한다. 청나라는 1685년과 1686년 두번에 걸쳐 알바진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후 쌍방은 협상을 통해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어 알바진을 중국이 차지하고, 외흥안령과 아이군강을 국경선으로 삼는다. 제정러시아는 동해로 진출하려는 꿈을 일단 포기하고 중국과 무역관계를 수립한다(나중에 제정러시아는 캬흐타조약, 아이훈조약, 베이징조약을 거쳐 차례로 국경선을 남하시켜 동해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제정러시아와 청나라는 어떻게 협상하고 조약을 체결하였을까? 현재 남아있는 조약본을 보면 라틴어본, 러시아어본, 만주어본으로 체결하였다(한문본은 없다). 라틴어본은 양측이 서명날인했고, 러시아어본은 러시아측만 서명날인하고, 만주어본은 청나라측만 서명날인했다. 그리고, 라틴어본과 러시아어본, 만주어본은 서로간에 대강의 뜻은 같지만, 세부적인 내용에는 차이가 많다고 한다. 러시아어본과 만주어본은 각각 자국만 서명날인하고, 라틴어본에 쌍방이 서명날인한 것을 보면, 결국 라틴어본이 기준본이다. 당시에는 라틴어가 국제공용어이고 제3의 언어이니 라틴어본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공정하고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을 청나라와 러시아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협상하고, 라틴어본까지 마련했을까? 여기에서 활약한 사람은 중국에 파견나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인 프랑스인 쟝 프랑소아 게르비옹(Jean-Francois Gerbillon)과 포르투갈인 토마스 페레이라(Thomas Pereira)라고 한다. 이들은 양측 대표들의 중간에서 통역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라틴어 조약문도 작성한다. 그리고 각각 일기를 남겨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조약의 내용을 기록해 놓아 후세 연구자들이 참고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캬흐타조약에서는 기본적으로 네르친스크조약과 동일한 방식을 채택한다. 그런데 아이훈조약에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즉, 청나라측은 만주어와 몽골어로 작성하여 러시아측에 교부하고, 러시아측은 만주어와 러시아어로 작성하여 청나라측에 교부한 것이다. 한편, 베이징조약에서는 또 달라진다. 청나라측은 한문으로 작성하여 러시아에 교부하고, 러시아는 러시아어로 작성하여 청나라에 교부한다.

이를 보면, 청나라와 러시아간에 초기에는 '국제공용어'인 당시의 라틴어를 기준본으로 하여 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다음에는 국제공용어가 아닌, 쌍방의 자국어로 각각 작성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중간의 국경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백두산정계비가 있다. 백두산정계비 탁본에는 "대청(大淸)"이라는 글자가 횡서로 크게 쓰여있고, 내용은 모조리 한문으로 되어 있다. "우라총독 무크덩은 황제의 뜻을 받들어 국경선을 조사하고자 이 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로는 압록이고, 동으로는 토문이다. 이에 물이 갈라지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한다. 강희오십일년 오월 십오일. 필첩식 수얼창, 통관 알거. 조선군관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 안타깝지만 백두산정계비에 한글은 없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정계비의 형식이다. 양국이 대등하게 합의하여 정계비를 세운 것이 아니라,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황제의 명을 받아 세운 것이며, 조선의 수행관리들은 뒤편에 작은 글씨로 관직과 이름만 적어놓았을 뿐이다.

이상의 사례들은 바로 국제간의 계약체결시 언어문제에 있어서 세가지 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3국언어(국제공용어)로 체결하는 방식, 쌍방국가 언어로 체결하는 방식, 일방국가 언어로 체결하는 방식.

계약서를 작성할 때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하는 것은 어떤 언어로 작성하느냐이다. 한국기업이 중국기업과 계약을 체결할 때, 언어문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유형을 나누면 역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세가지이다.

첫째, 국제공용어(영어)로 체결하는 경우가 있다. 영어본만 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영어본과 중국어본, 한글본을 같이 체결하는 경우도 있다. 둘째, 쌍방국가의 언어로 체결하는 경우가 있다. 즉, 중국어본과 한글본으로 체결하는 것이다. 셋째, 어느 일방국가의 언어로 체결하는 경우가 있다. 즉, 중국어본 혹은 한글본 중 하나로만 체결하는 것이다.

계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위의 셋째방식 즉, 어느 일방국가의 언어로 작성하는 것은 공평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와 조선같이 교섭력에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경우이거나, 한국계 중국현지법인과 한국회사간의 계약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 볼 수 있다. 계약서에서 교섭력의 강약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언어본', '준거법'과 '분쟁해결조항'이다. 만일, 계약을 한국어만으로 작성하고,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하고,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면, 한국기업의 교섭력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경우일 것이다. 반대로, 중국어만으로 작성하고, 중국법을 준거법으로 하고, 중국인민법원의 재판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면 중국기업의 교섭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경우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첫째나 둘째 방식은 둘다 공평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양측의 언어로 각각 작성한 후 두 언어본을 모두 정본으로 하여 체결한다면 형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공평하다. 다만, 두 언어본 사이에 표현이나 이해상의 차이가 나타나서, 중국측은 중국어본을 가지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한국측은 한글본을 가지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할 때, 해결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점에서, 제3의 언어이자 국제공용어로 양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언어, 통상적으로는 영어로 체결한다면 공평하면서도 합리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한국기업과 중국기업간에 한중수교후 이루어진 초기의 계약은 영어본으로 된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한국기업들이 초기에 대중국업무경험이 많은 홍콩로펌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홍콩로펌들이 기본적으로 영어로 계약서를 작성하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한국어와 중국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통역, 번역해줄 수 있는 전문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영어본을 만들면 좋은 점이 많다. 분쟁해결방식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볼 수 있는 제3국중재시, 영어본이 있으면 영어로 중재하는 데 편리하다. 또한, 쌍방투자자들이 각자 자신의 언어본의 문구만을 고집하며 대치하는 국면을 회피할 수 있고, 중문본/한글본을 먼저 협의완료한 후 영어본을 작성하는 경우에는, 영어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쌍방간에 합의가 미진했던 부분이나 한글, 중문으로 애매하게 표현된 부분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영어본을 작성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여러가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점도 있다. 영어본으로 협의하는 경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어느 일방의 협상인원이나 의사결정자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예전에, 영문으로 계약서를 초안하여 중국기업에 보냈더니 한참동안 감감무소식이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의사결정자인 경영진이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다보니, 회사내에서 영어가능한 인력이 모두 동원되어 영어계약을 번역하고, 의사결정자는 중문본만 보고 이런저런 지시를 하게 되니, 이를 다시 영어본에 반영하여 회신하느라 시간이 엄청나게 걸렸다는 것이다. 이외에, 시간이 추가로 드는 만큼 번역비용, 변호사비용 등 제반비용도 추가로 들게 된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기업과 중국기업간의 계약에서도 아주 중요한 계약인 경우에는 영어본을 만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어본을 만들지 않고, 중국어본과 한글본만으로 체결하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 한 합자기업에서는 초기에 계약뿐 아니라 동사회의사록까지 영어본을 추가로 만들어 두었는데, 나중에는 중문본과 한글본만 작성하는 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는 청나라와 러시아간의 국경조약에서 초기에 라틴어본을 두다가, 나중에는 라틴어본이 아닌 양국의 언어로만 작성하는 것으로 바뀌어간 것과 묘하게 일치한다. 아마도, 서로간에 이해가 불충분하고, 양국언어를 충분히 통역, 번역할 수 있는 전문인력이 부족할 때는 국제공용어인 제3국언어로 계약을 체결하지만, 양국관계가 밀접해지고, 양국언어를 서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단계가 되면, 굳이 제3국 언어로 작성하지 않고 양국의 자국어로 계약을 체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계약서 작성시, 한국과 중국의 기업들이 한글과 중국어로 직접 협상하고 한글본과 중국어본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가 이미 그만큼 가까워진 것을 의미할 것이다.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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