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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언

우리 헌법에 맺힌 사상의 능금들

신우철 교수(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원고마감을 재촉이라도 하듯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새벽녘. 늙도젊도 않은 나이에 벌써 시들어버린 글심(文勢)을 한탄하며 하릴없이 헌법전을 뒤적이던 중, 윤동주의 시 '돌아와 보는 밤' 가운데 한 소절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 동시에 나는, 우리 헌법에 맺힌 사상의 능금들, 수십 년을 삭여내고 또 삭여내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한 그 이념의 편린들을 떠올렸다.

현행헌법 전문의 "사회적 폐습을 타파"한다는 문구는 건국헌법 전문에서 "민주주의 제 제도를 수립"한다는 문구와 대구를 이루었는데, 여기에는 '파괴와 건설'이라는 무정부주의 사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 사상적 계보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을 필두로 유림의 무정부주의자연맹강령(1929), 조소앙의 한살림요령(1925)과 건국강령(1941)으로 연결되는데, 무정부주의 세력을 흡수한 임시정부는 임시헌장(1944)의 전문에서 그 사상을 실정헌법의 일부로 수용했다. 이 임시헌장을 참고한 건국헌법의 전문에는 당연히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건국헌법 제1조부터 유래한 현행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을 헌법전의 제일 첫머리에 배열했다. 대외적 주권의 회복을 제1 목표로 삼아 투쟁하던 시기의 강력한 국가주의·민족주의 경향이 광복을 계기로 헌법전에 응집된 결과다. 물론, 이러한 이념적 성향은 억압적 국가를 배격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을 추구하는 무정부주의와는 상치되는 것이다.

헌법 제1조는 이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했는데, 그 원전인 바이마르헌법은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한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여기서 '모든 권력'이란 표현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에 속한다"라고 규정한 레닌헌법(1918) 제1조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좌·우를 망라하여 우리 헌법에 투사(透射)된 다채로운 사상의 스펙트럼은 한민족이 지나온 역사적 고난의 궤적인 것이며, 헌법 수준에서나마 북측을 아우르는 완전한 국가의 청사진을 그리고자 했던 개방적·종합적 사유의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 헌법에 맺힌 이 사상의 능금들이 '봉건적 인습'에 찌든 독재정권의 어뢰 한방에 모조리 낙과(落果)해버릴 듯 위태로워 보인다. '돌아와 보는 밤'의 또 한 소절에서 시인은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라고 읊었다. 시인의 마음 그대로, 헌법학자의 마음 역시 마치 비속에 젖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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